명렬님의 고향, 영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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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렬님의 고향 靈巖(영암)은...
1. 역사
고려시대
성종14년(995년)에 안남도호부의 하나인 낭주로 되었다가 현종9년(1018년) 다시 영암으로 개칭 지금에 이르고 있음.
별박사 최지몽 (907~987)이 유학과 천문학으로 고려 건국과 고려초기 왕조 안정에 기여하였음.
우리나라 최대의 마애불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과 1009년에 건립된 성풍사지 5층석탑(보물 제1118호), 도갑사 석조여래좌상(보물89호) 등에서 영암의 불교문화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음.
우리나라 3대 해신당의 하나인 남해신사에서는 고려 현종때부터 국조오례의에 의하여 해신제를 지내왔음.
조선시대
행정구역은 완도의 장좌도(청해진), 남으로 보길도, 추자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1409년 진도가 진도군으로 분할되고 삼산면, 옥천면, 화원면 일대가 해남으로 편입되었으며, 1896년 보길도,추자도가 완도군으로 북평면, 송지면 등이 해남군으로 이속되고, 나주에 속한 시종ㆍ신북면 일부와 금정면이 영암군으로 편입됨
인구는 1423년도에 1,229명(세종실록지리지), 1789년에 29,288명(여지도서)으로 기록됨.
향약을 기초로한 구림대동계는 1565년(명종20년)에 창립되어 향약적 지방의 질서를 확립.
문학으로 오한 박성건의 금성별곡, 삼당시인 고죽 최경창, 연촌 최덕지선생과 학성군 김 완장군 등 수많은 명인을 배출.
영암인 악성 김창조(1856~1919년) 선생은 민족정서를 승화시킨 불후의 명장 가야금산조를 창시하고 한성기, 김죽파, 김병호 명인을 배출한 산조음악의 본향.
대한민국
1979년 영암면이, 2003년 삼호면이 읍으로 승격 2읍 9면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음.
우리 영암은 1965년 141,489명이 거주하였으나 이농현상과 학군등으로 1995년에는 62,400명까지 줄어들었으며, 현재 인구수는 65,699명으로 증가 추세임.
1988년 월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됨(제20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기초하신 건국원훈 낭산 김준연 선생의 고향으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인걸의 고장임.
2. 월출산
월출산(月出山)은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 사이에 산이다. 1973년 1월 29일에 도립공원으로, 1988년 6월 1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황봉(809m)이고 구정봉, 사자봉, 도갑봉, 주거봉 등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56.1㎢에 암석 노출지와 급경사 계곡이 많아 생태계가 풍부하게 유지되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식물 약 700종, 동물 약 800종이 서식하고 있고, 오랜 세월 암석 지형에 적응해 온 생태적인 독특성과 난대림과 온대림이 혼재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 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다고한다.
3. 큰 인물 : 한국1800축복가정회 홈페이지 관리위원회 위원장 김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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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ryel님의 댓글
3. 큰인물소개- 왕인 박사
왕인은 백제 근초고왕 때의 학자로 근초고왕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 등을 보내어 학덕 높은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왕의 손자인 진송왕과 함께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오진천황의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신하들에게 경·사를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에는 그의 이름이 '화미길사'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아신왕 말년경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어서 전후 30∼40년간의 차이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입으로 전해지기만 했을 뿐 역사에는 전혀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대판과 경도의 중간지점인 히라카타에 있다.
왕인 박사 유적지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당, 내삼문, 외삼문, 문산재, 양사재, 전시관, 왕인상, 책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인 백제문을 들어서면 왕인이 태어나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학문을 전하는 과정 등을 담은 그림을 전시한 전시관이 있고, 문 하나를 더 들어가면 안쪽에 왕인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왕인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유적지 뒤로는 월출산이 있는데 그 오른쪽 기슭이 왕인이 태어났다는 성기동이다. 성기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왕인이 마셨다고 하여 성천이라고 불리며 이 지방에서 벌어지는 산유놀이 때, 성천의 물을 마시면 왕인과 같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왕인의 탄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에는 바위가 몇 개 있다.
월출산 중턱을 거슬러 오르면 왕인이 공부했다는 책굴, 문산재, 양사재가 있는데 문산재와 양사재에서는 매년 3월 3일에 왕인박사 추모제를 거행했다고 한다. 또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은 모습의 석상이 있는데 이 석상은 왕인의 제자들이 일본으로 간 스승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다고 전한다.
성기동 남서쪽에는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동료, 문하생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정든 고향을 되돌아보았다고 하는 돌정고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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