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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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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일기2

1973년 7월10일( ?요일)

지난 7월 1일 밤, 학생부장 김정호씨 환송예배 및 청년회 임원 임명장 수여식 관계로 밤11시 30분이 지나서야 폐회를 했다.
새로 온 학생 몇몇과 여늬때는 잘 나오지도 않던 학생들이 참석하여 학생들만 30명이 넘었다.

좁은 동내 길가에 전세로 얻은 작은 기와집 교회여서, 화동회 하느라고 주위를 좀 떠들석하게 한데다가 학생들이 학교규정 통금시간(?)을 어겼다고 주위가 소란했다. 아차! 했지만 엎지러 놓은 물...

다음날 새벽 정호씨와 대구행 버스를 탔다.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달랑 40원만 가지고 대구에 다녀온 것이 다음날인 3일 오후 3시경.
각 학교에서 시끄럽게 문제가 확대되어 있다고 모두들 불안해 하며 떨고 있었다. 나는 즉시 학교로 방문하여 교사들과 면담하였다.

교사들은 노골적으로 "ㅡ 우리 학생들을 학교와 부모들에게로 돌려 달라.ㅡ" 란다. 그리고 이미 지난 7일부터 12명의 학생들이 학교로부터 근신 처분을 당했다.

교회 환경과 안팎의 여건이 열악했던 탓도 있었지만,결과적으로 학교와 주위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에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는 하늘과 나만은 진작부터 마음 조리고 예견했던 바이다.

그리고 그젓께 8일에는 여고 교장선생을 방문하여 우리 학생들의 신앙 문제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또 어제 9일 오후에는 보안대에서 사복차림의 청년이 찾아와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아무래도 울진 좁은 바닥이 좀은 시끄러워진 모양이다.

어젯밤 김연주,김명희,이금년(6000가정, 일본 생활ㅡ777가정 이상근님의 동생) 학생이 공부하러 교회로 왔다.시험때라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연주네 집에서 언니가 찾아와 "ㅡ교회에 미쳤느니 어쩌니ㅡ"하면서 한바탕 하고 나서 연주를 데리고 갔다.
읍내 어디선가 자취를 하고 있는 금연이와 명희가 1박하고 아침에 떠났다.


( 기 도 )


벽에 붙어

사면이 다 두려운 한마리 해충처럼
구석에 죽은듯 엎데여 있습니다.

나의 기도는 의미도 소리도 없는
약하고 부질없는 더듬이의 움직임과도 같습니다.

나의 존재를 의식하는 이 시간은
빛도 어둠도 없는 영겁 중의 한 순간입니다.

새 생명이 잉태되는 바로 그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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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KDW님의 딸님의 댓글

아빠의 목회일기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 아빠의 젊은 시절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수필, 회고록을 남겨주세요. 전에 아빠가 열심히 컴퓨터로 글을 쓰시던 것이 이것인가요?
아빠가 틀린 부분 없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셔서 문법적인 것만 대충 확인했기에 내용을 잘 몰라요. 변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그때 바빴거든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아빠의 목회일기(젊은 시절의 신앙생활)라서 신선한 충격입니다.
우리 집안의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대대로 남겨 주실만한 아빠의 자세한 회고록(個人史)같은 것을 따로 써주시면 어떨까요? 이곳에 공개적으로 남기시는 글 말구요. (교회판은 최대한 줄여서 글을 쓰셔야 하니까요...)

우리 김씨 가문에 외로이 아빠 홀로 통일교의 첫 물꼬리(?)를 트셨는데...(엄마는 이모로 부터 전도 되셨지요?)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신앙의 길을 걸어오셨을까, 딸로서는 아빠가 안스러우면서도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됩니다.
부모나 일가친척, 형제자매들로 부터 핍박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참부모님의 뜻을 따라 오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내적,외적으로 더 강해지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요. 그러한 환경적인 영향으로 말이지요.
(서른이 넘은 이제서야 그런 아빠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제 자신이 부끄럽네요.)

우리 2세들은 그런 부모들의 심정을 알기나 할까요? 시대적 혜택으로 편한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모태신앙이다 보니 1세 부모님 만큼의 간절한 마음이 덜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사회인이 되면서 각자 살아가기 바빠 신앙생활 조차 하지 못하는 2세들도 꽤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를 비롯해서요...) ㅡ.ㅡ;

박순철님의 댓글

왕회장님의 일기에서 그 당시를 살은 대부분의 식구들이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회한에 빠집니다.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제, 늦지 않았습니다.
왕회장님의 낡은 일기가 올라온 소이연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무언가, 이 시대에 걸맞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찾아서 --- 아직 어울리지 않지만 --- 노익장을 발휘하십시오.
고희를 바라보는 조항삼형님도 그냥 있지 않습니다.

조양묵님의 댓글

뜻이 있으면 뭔들 할 수있다고 했던 그 용기는 젊은이의 특권이고 선택받은 식구들의 사명이였습니다. 메시아와같이.................................. 그러나 아무 준비없이 30여년을 보내고 보니 부끄러운 모습뿐입니다.

김동운님의 댓글

첫 임지인 울진 목회자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 곽정환 회장님을 모시고 대학가(성대,단국대,동국대,숭전대,중앙대)에서 학사장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죽어도 울진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오죽 했으면 당시 교구장이셨던 故 박종구 선배님께서 비포장길ㅡ 자갈밭 길을 작은 오토바이이를 몰고 순회를 오셔서 나에게 조용히 귀속말로 "서울로 가라 곽부장께서 찾으니 좋은 기회이다."라고 하시며 평소에 아끼던 후배에게 다정하게 해주셨는데도 나는 막무가내로 버티었던 기억이 새롭다. 볼리비아의 이화식형제님 말마따나 그때 오토바이 나사가 몇개나 풀릴 정도로 대구에서 울진 오는 비포장길이 험했었다.

이존형님의 댓글

김동운목사님이 왜 초대 회장님이되셨고
왜 왕회장님이라는지 대충 감이 잡힙니다.

감히 여기에 어떻게 그 일기를 공개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 자신의 일기장을 천하에
공개하시는 용기가 왕 회장님으로 추대받고도
남을 듯 합니다.

그 아래로 줄줄이 왕 회장님으로 엮어놓어셨어니
우리 1800가정의 역대 회장님은 모두가 왕 회장이십니다요.

회장님 출신 모두는 왕이시니 백성들을 두루두루
골고루 성은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정해관님의 댓글

회장님의 (초대) 회장님 되심을 깨닫게 하는 초창기의 승전가요 사도행전記에 동경 꿈소녀식 표현으로다가 '많은 감동 묵고 갑니데이'

(댓글을 써서 올렸는데, 컴이 늦게 반응하여 급한 성질에 또 Enter키를 치면 두번 기록 됩니다. 두 번째를 삭제하려면 댓글의 글자 위 날짜 옆의 별표에 왼쪽 커서를 대면 '삭제할깝쇼?'가 뜹니다. --고개 끄덕이면 되죠. 그렇다고 손 까딱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면 아직은 그놈이 알아묵지 못함--

그리고 컴이 좀 우리들 나이처럼 역사적?이거나,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아서리, 본문이나 댓글을 정성들여 많은 분량으로 썼는데, 나중에 [글쓰기]나 Enter키를 쳤더니 그놈들이 소리소문 없이 영계로 가 버리는 황당한 경우가 잇는데, 그런 경험 있는 분들은 써 놓으신 글들을 먼저 카피한 다음 조심스레 올렸다가 날아가면 또 부르면(그곳에 재현) 되지요...이해가 잘 안되면 무조건 아이들 불러 물어보면 되고요. --)

김동운님의 댓글

A형 교회도 없던 척박했던 환경 가운데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오직 믿음과 님을 향한 그리움 하나로, 순수와 열정 하나로 지나온 옛 총각 시절이,
새삼 나의 유일한 자랑 거리가 될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우연히 지나간 옛 노트를 그냥 남길 수 없어 이렇게 옮기는 만용을 용납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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