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선종…"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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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뉴시스 | 기사입력 2009.02.16 18:27
김수환 추기경이 87세를 일기로 16일 오후 6시12분 별세했다. 1969년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돼 최고령 추기경으로 선종(善終) 했다.
김 추기경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지난해 8월29일부터 서울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해 6월11일 조촐한 생일파티가 세상에 공개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후 끊임없이 위독설이 나돌았고 수차례 고비를 넘겼다. 최근에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졌다.
김 추기경은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대주교가 됐다. 이듬해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탄생이다. 이후 30년 동안 천주도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2차례 역임했다.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이 됐을 때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봉사하는 교회',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후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곧 관심을 가졌다. 독재와 불평등한 현실에 대해서는 강경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역사적 순간마다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70년대에는 정치적으로 탄압 받는 인사들의 인권과 정의 회복을 위해 일했다. 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정치권력에게 배제 당했지만 결국 천주교회의 지위는 격상됐다.
김 추기경은 장애인과 사형수, 철거민과 빈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기구로 설립, 소외된 이들을 돕는 서울대교구의 복지시설을 늘리는 데에 힘을 쏟았다.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지만 스스로를 늘 부족하다고 여겼다. 99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70평생을 회고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책을 2권 펴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다.
이들 산문집에는 "가톨릭 최고의 성직자로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고백, "예수와 닮은 사제로서 살아오지 못했다"는 반성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웃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지 못함으로써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김 추기경의 사목 표어다. 자신의 신념을 온 몸으로 실천하다 떠난 김 추기경은 종교 지도자를 넘어선 대한민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다.
"詩를 사랑한, 소년처럼 천진했던 분…"
[김수환 추기경 선종] 각계 인사들이 간직한 고인의 추억
시인 김지하, 보들레르 시 줄줄 암송·밤새워 정치 참여 토론
김영삼 前대통령 "민주주의 위해 살아남아야" 단식투쟁 말려
김대중 前대통령, 줄곧 가르침·조언…투옥됐을 땐 차입금 보내
김지원 기자 eddie@hk.co.kr고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에서 17일 추모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신자가 고인의 사진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조영호기자 voldo@hk.co.kr
고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에서 17일 추모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신자가 고인의 사진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조영호기자 voldo@hk.co.kr
김수환 추기경이 2007년 10월 모교인 동성고 개교 100주년 기념 전시회 때 그린 자화상. 제목을 '바보야'라고 쓴 김 추기경은 "인간이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겠나,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2007년 10월 모교인 동성고 개교 100주년 기념 전시회 때 그린 자화상. 제목을 '바보야'라고 쓴 김 추기경은 "인간이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겠나,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보들레르의 시를 줄줄 외우던 시인, 어린애처럼 천진한 할아버지, 세뱃돈 1만원을 쥐어주던 따뜻한 손길.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고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다. 김 추기경에 대한 개인적 추억을 간직한 우리 사회 각계 인사들은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그의 생전 모습을 떠올렸다.
시인 김지하씨는 김 추기경이 결혼식 주례를 섰을 만큼 인연이 각별하다. 김씨가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가톨릭계 잡지 '창조'에 자신의 정치풍자시 '비어(蜚語)'가 실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일로 잡지가 압수되고 주간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난 후 김 추기경은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연금된 김씨를 찾아갔다.
김 추기경은 2004년 출간된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처음에는 욕설투성이 시가 내 이름으로 발행되는 잡지에 실린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시를 다시 훑어보니 김지하를 직접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가톨릭의 정치 참여에 대한 토론 등으로 밤늦도록 이어졌다. 김씨는 "추기경님이 나 못지않은 야행성이시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추기경님은 보들레르의 시를 줄줄 외울 정도의 시인이시고 아주 큰 예술가셨다"고 첫 만남을 회고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7일 고인의 빈소를 찾아 1983년 전두환 정권에 맞서 단식투쟁을 할 때 자신을 말리던 김 추기경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23일간 죽을 각오로 단식을 했는데 그때 찾아와 강하게 만류하셨습니다. '그대의 몸이 상하면 누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는가. 살아야 한다'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23일간의 단식을 끝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날 빈소에서 야당 때부터 대통령 때까지 줄곧 김 추기경으로부터 가르침과 의견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진주, 청주 교도소에 투옥됐을 때 직접 면회를 오셨고, 아내(이희호 여사)에게 100만원씩 두 번의 차입금도 주신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1970년께부터 동성고 선배인 김 추기경과 꾸준히 교류했다는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은 세뱃돈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했다. 김 추기경은 매년 세배를 하러 오는 고교 동문들에게 5,000원을 주곤 했는데 2000년께부터 1만원으로 올랐다는 것. "이유를 여쭈자 추기경님은 '최근 물가가 너무 올랐기 때문'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서민들의 고통을 걱정하셨습니다."
1990년대 후반 비서로 김 추기경을 가까이 모신 최성우 신부는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리더"로 고인을 기억했다. 최 신부는 김 추기경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아름다운 리더십'이라는 글에서 김 추기경의 애창곡을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와 대중가요 '애모' '만남' '사랑으로' 등이라고 소개했다. "김 추기경께서 방문하는 본당마다 노래를 해달라고 졸랐다. 어른을 초청해 놓고 어른에게 재롱을 떨라고 하는 모양새인데도 추기경님은 불러 주신다. 어떤 때는 앙코르도 하셨다."
가수 인순이는 김 추기경이 특별히 아꼈던 사람이었다. 고인은 인순이의 삶의 아픔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7일 빈소를 찾은 인순이는 "뵐 때마다 내 등을 두드려주시며 '열심히 잘 살아왔다. 세실리아(인순이의 세례명) 예쁘다'고 말씀해주셨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2004년 김 추기경 회고록에 쓴 추천사에서, 발레 공연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가까이서 추기경을 봤을 때 "어쩌면 저렇게 어린애처럼 천진해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 추기경님을 뵐 때마다 어릴 적 할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가까이 다가가기 싫은 것 같으면서도 좋고, 어쩐지 우쭐해지는 느낌과 큰 빽이 있는 사람과 가까이한 것 같은 든든하고 훈훈한 느낌이 어릴 때 할아버지의 밥상머리에서 받은 느낌과 비슷하다." 박완서씨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든든하고 훈훈한 할아버지의 밥상머리를 잃었다.
[李대통령 조문 "작년 성탄절 마지막 병문안…"]
"그땐 말씀도 나누셨는데"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오후 고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을 찾아 조문하고 정진석 추기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오후 고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을 찾아 조문하고 정진석 추기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우리 모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함께 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17일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 빈소를 찾아 애도한 뒤 방명록에 이런 애틋한 글을 남겼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진석 추기경, 안병철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의 안내로 명동성당 대성전에 입장한 뒤 김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서 30~40초 간 조의를 표했다. 이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고 잠시 눈을 감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고인과의 마지막이 못내 아쉬운 듯 김 추기경의 머리 쪽에서 다시 20여초 간 고개 숙인 뒤 양 손으로 관 모서리를 잡고 김 추기경의 얼굴을 지켜봤다.
이 대통령은 조문이 끝난 뒤 정 추기경에게 "지난해 성탄절 때 뵐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때는 말씀도 나누시고 하셨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정 추기경은 "그 때가 사실상 마지막이셨다. 그 뒤로는 기력이 더 떨어져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그날 교회에 갔다가 갑자기 뵙고 싶어서 병문안을 가게 됐다"며 "힘드시니 그냥 계시라고 만류하는데도 자꾸 말씀을 하려 하셨다"고 지난해 12월 병문안 당시를 회상했다.
이 대통령은 또 "40년 전 추기경이 되셨을 때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감이 없었을 때인데 정말 한국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은 "어렵고 힘들 때 국민에게 사랑하고 나누라는 큰 가르침을 남기셨다"고 김 추기경의 선종을 거듭 애도했다.
이 대통령은 빈소를 나서면서 조문을 위해 줄을 서 있는 시민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잠시 얘기를 나눈 뒤 명동성당을 떠났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교황 베네딕토 16세 추모사
저의 존경하는 형제이신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을 느끼며 추기경님과 모든 한국인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랫동안 서울의 가톨릭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추기경단의 일원으로서 여러 해 동안 교황에게 충심으로 협력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아버지께서 그분의 노고에 보답해주시고 그분의 고귀한 영혼을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로 맞아들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장례미사에 모인 김수환 추기경님의 친족과 모든 분에게 주님의 힘과 위로에 대한 보증으로서 진심으로 사도의 축복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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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등록일 : 2009.02.19 09:02
문형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사랑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시대를 밝혀온 등불이 꺼지매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이를 사랑으로 품어 오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항상 어려운 자리에서 먼저 하시고, 고통에 빠진 민중을 이끌어 오신 시대의 지도자셨습니다. 저는 한때 미국의 가톨릭계 페어필드 대학(Fairfield University)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당시 수행하는 참된 종교인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경험이 있기에 추기경님의 선종은 너무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그리움 또한 큽니다.
마태복음 5장 7∼9절에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 하였습니다.
저는 김 추기경께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을 믿습니다. 믿음은 다르나 추기경님의 일생은 온전히 그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가시는 날까지 몸마저 남에게 베푸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남은 자들에게 새 희망을 심어주고 가는 것만큼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고 원하시는 바가 아닌지요. 이념, 종교, 빈부를 넘어선 사랑이었습니다.
저의 부친인 문선명 총재께서는 “선종은 영인체가 생명으로서 또 다른 삶을 출발하는 축하의식이다. 같은 생활권으로부터 떠나간다는 의미에서 섭섭함이나 아쉬움은 있지만, 선종은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아름답고 빛나는, 실로 기쁜 것으로 지상의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 이어져 지속된다”고 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영계로 가셨으나 하늘에서 지상의 모든 종교인을 돕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명동성당에는 김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사랑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어려운 곳을 먼저 비추는 사랑이 있다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신 추기경님 마지막 떠나시는 발걸음에 다시금 말씀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추기경님 감사합니다.”
문형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정해관님의 댓글
임철순 주필 ycs@hk.co.kr
민주화투쟁이 본격화한 1974년 봄 어느 날 밤, 추기경 명의로 성명이 발표돼 명동성당에 취재하러 갔다. 뒤늦게 온 다른 신문의 기자는 벌게진 얼굴에 술 냄새를 풍기며 추기경의 한자 이름을 홍보 담당자에게 물었다. 추기경은 그 때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언론을 강론을 통해 비판하기도 했는데, '투쟁에 동참은 못할 망정 추기경의 이름도 모르다니' 하고 분개한 나는 "목숨 수 빛날 환!"하고 대신 쏘아 붙였다. 나는 견습이었지만 그 언론계 선배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길이 찬미 받을 생명과 정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를 앞두고 그 이름을 되새겨 본다. 지금은 하도 한자를 쓰지 않아 김 추기경의 한자이름을 아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지만, 목숨이 빛난다는 것은 생명과 정신, 명예가 길이 빛난다는 말과 다름없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살았던 87년의 아름답고 장한 생애는 그 자신의 이름은 물론 한국 천주교를 세계에 빛나게 했다. 김 추기경이 선종하자 많은 사람들이 안방 같았던 분, 편안히 쉴 날개 밑, 깃들어 숨을 안식처였다며 애도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빛나는 원천은 겸허와 회의, 유머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김수환은 □□다'라는 말을 채우라고 하자 '바보'라고 즉답했다는 김 추기경은 나이 들수록 더 보기 좋고 맑은 표정으로 바보웃음의 향기를 퍼뜨렸다. 大賢如愚(대현여우), 크게 어진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는데, 가난한 옹기장수의 8남매 중 막내는 아호도 투박함 성실함 바보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옹기(饔器)라고 했다. 본인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나마 이 아호는 작년에야 공개됐다고 한다.
옹기는 천주교가 박해 받을 때 신자들이 산에서 구워 내다 팔던 생계수단이었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면서 모든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김 추기경의 수많은 어록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오는 데 70년이 걸렸다"는 말이다. 여러 외국어에 능하지만 참말과 거짓말 두 가지 말을 잘 한다는 유머도 인상적이다.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1912~1993)은 열반에 들기 전 임종게(臨終偈)에서 "일생동안 남녀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고 말했었다.
대현은 이렇게 서로 통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 추기경은 신앙을 확신하는 형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이 확신에 찬 어조로 들렸을지 몰라도 본인은 늘 내면에서 길을 묻고 찾았다는 것이다. 1969년 추기경 임명 소식을 들었을 때도 "틀림없이 뭐가 잘못된 거야. 이걸 어떡하나, 이걸 어떡하나" 하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다들 나에게 와서 어렵고 힘든 얘기를 털어놓는데 난 누구와 상의해야 하나"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김 추기경의 '30년 불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 추기경은 추기경이 되기 직전까지도 하느님 손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계속했으며, 사제 수품, 주교 임명 등 중요한 고비를 맞을 때마다 도망치고 싶은 유혹과 남몰래 싸웠다고 한다. 그런 점이 오히려 그의 말과 삶을 더 신뢰할 수 있게 한다. 언제나 겸허하면서, 반성하고 회의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김 추기경의 선종 이후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며 김 추기경을 추도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이제 그런 분은 다시 없을 것
오늘 흙에 묻히는 김 추기경의 묘비에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는 말이 새겨진다고 한다. 당신은 정말 아쉬운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은 김 추기경의 부재로 아쉬운 것이 참 많다.
촉(蜀)을 멸망시킨 위(魏)의 장수가 제갈 양이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백성들은 "특별히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어쩐지 그런 분은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말 그대로 김 추기경과 같은 분을 이제는 어디서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
정해관님의 댓글
추기경은 1962년 교황 요한 23세의 특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주교 중에서 선출되었는데, 1586년 이래 70명이던 것을 100명으로, 1970년에 바울로 6세가 다시 130명으로 증원했다. 또 1991년에 22명이 추가되어 총 163명이다. 1969년에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됨으로써 동양에서는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2006년에는 정진석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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