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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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四端七情 論爭’의 發端과 進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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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四端七情의 意味
四端은 孟子가 처음 사용한 槪念으로서, 네 가지 실마리란 뜻이다. 孟子는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의 4단을 바탕으로 삼아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한 本性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4단 가운데 맹자가 가장 중시한 것은 惻隱之心으로, 이는 남의 어려움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맹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가 막 물속에 빠지려는 것을 본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 마음의 결과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기를 구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측은지심 외에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것이 羞惡之心이며, 남에게 양보하는 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是非之心이 곧 4단인데, 이 4가지 실마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들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여기서 측은지심이 잘 발전하면 仁이 되고, 수오지심은 義가 되며, 사양지심은 禮가, 시비지심은 智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4단은 仁義禮智의 실마리인 셈이다.
7정은 4단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다. 7정의 표현은 <禮記>에 나타나는데, 이는 喜. 怒. 哀. 懼. 愛. 惡. 欲으로, 기뻐함. 성냄. 슬퍼함. 두려워함. 사랑함. 미워함. 욕심냄을 말하는데, 이 7가지 감정은 사람들이 배우지 않고서도 저절로 그렇게 할 줄 아는 것 이라고 한다.
사실 4단이나 7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다만 4단이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道德的 感情이라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만 하면 언제든 선으로 歸結되는 것이라면, 7정은 밖으로 드러날 때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그 결과가 악이 될 수도 있는 ‘一般的인 感情’인 셈이다. 이황과 기대승의 論爭은 바로 4단과 7정이 무엇을 根據로 나오며 서로 어떤 關係에 있는지를 따진 것이다.
2] 論爭의 發端
四端七情 論爭의 發端은 동시대의 학자 秋巒 鄭之雲이 작성한 <天命圖>를 李滉이 修正하면서 비롯되었다. 본래 정지운은 동생(정지림)을 가르치기 위해 [天命圖]와 圖解를 作成했는데 그 내용이 세상에 流布되면서 李滉도 이를 보게 되었다. 정지운이 “4단은 理에서 발한 것이고 7정은 氣에서 발한 것이다 (事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작성했던 부분을 “4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치자 (정지운이 이황의 견해를 따라 새로 <천명신도>를 작성하게 됨) 이에 대해 기대승이 異義를 提起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과 기대승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입장을 說明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四端七情 論爭으로 장장 8년간 계속된다.
이 논쟁은 表面的으로는 이황과 기대승 두 학자 간의 個人的 關心事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학계에 朱子學의 理氣論과 心性論에 대한 두 가지 相異한 解釋 方式이 共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3] 四端七情 論爭의 朱子學的 意義
朱子學의 基本 內容은 存在와 當爲의 關係를 理와 氣로써 解明하고 있다.
그 方法으로서의 格物致知는 천하의 事事物物에 나아가 그 理致를 窮究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物’이라고 한 것은 物件으로서의 의미보다는 ‘事態’ 또는 ‘事件’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기서 事件이란 바로 君臣關係, 父子 關係 등을 總括하는 人倫關係를 의미한다. 따라서 朱子學에서 天下의 사사물물에 나아가서 밝히고자 하는 窮極的 對象은 사물에 내재하는 物理的 法則이 아니라 그러한 물리적 법칙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必然之理’곧 ‘事物當然之理’이다. 곧 일체의 사물을 지배하는 도덕적 標準을 客觀的 事物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주희의 이러한 노력은 사실 萬有를 包括하는 존재의 근거(곧 理)에 統一性과 永遠性을 賦與하기 위한 試圖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은 理의 作用性을 强調한 이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과 악을 서로 對應하는 槪念으로
把握함으로써 個人의 行爲에 대한 자기 反省的 修養을 무엇보다 重視한 李滉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李滉은 奇大升과는 반대로 四端七情도 相對的인 槪念으로 보아야 한다는 立場을 제기했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四端이 七情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도리어 인간의 道德的인 행위에 制限을 가하는 것으로 보고 七情보다는 사단을, 악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각각 理와 氣에 분리 소속시킴으로써 사단의 獨立性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현실에서 선과 악이라는 문제를 주자학의 본래의 범주로 구분하지 않고, 양자간에 緊張關係를 造成함으로써 개인의 道德的 實踐을 더욱 절실하게 促求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사람의 論旨를 좀더 분명히 檢討하기 위해서는 四端에 대한 分析이 필요하다. 사단을 순선무악한 絶對的. 無條件的인 선으로 規定한다면 四端에는 부중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황 식의 구분이 가능하다. 이는 ‘四端을 擴充하면 사해를 보존할 수 있다’는 孟子의 표현에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四端이 인간의 心理現像 일반을 指稱한 것이라면 주희와 기대승이 指摘한 것처럼 四端에도 부중절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맹자가 말한 擴充의 意味를 四端이 正常的으로 作用하도록 해야 한다는 制限的 意味로 解釋할 때 可能하다.
요컨대 七情은 인간의 心理現像 一般, 곧 慾求를 指稱한 것이고 四端은 선한 부분만 추려서 말한 것이라면, 이황 식의 구분이 不可能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칠정과 사단이 다 같이 인간 심리 일반을 지칭한 것이라면 기대승이 말한 것처럼 이황식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對照的인 立論이 可能하다는 것은 朱子學의 심성론 체계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논쟁이 주자학 이론에 대한 自己 檢證이라는 問題意識을 중심으로 展開됨으로써 心性論과 理氣論의 結合이 좀더 多樣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成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朝鮮의 朱子學은 李滉과 奇大升 간에 일어났던 四端七情 論爭을 통해 주자학의 기본 주제인 理氣論과 心性論을 結合시킴으로써 中國 朱子學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獨自性을 獲得할 수 있었다고 評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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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1558년(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史官)을 거쳐 사정(司正)이 되었으나, 훈구파에 의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선조 때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해직된 다음에 다시 부제학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전라북도 고부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고전에 능통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황의 제자가 되어 김인후 등과 왕래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특히,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8년 동안이나 논란을 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일 이후로는 이황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써서 광국공신3등(光國功臣三等)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저서에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이 있다.
<사진>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서원이다.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시작하여 1576년 완공하였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 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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