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충무공과 그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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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고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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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협상을 진행하던 4년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1만명 이상의 수군병력을 집결시켜 일본군과 대치했다. 잘 알려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되는 ‘한산도가’도 이 무렵 지은 것이다.
정유재란 직전인 1596년 12월 ‘부산왜영방화사건’이 있었다. 이순신은 거제 현령 안위 등이 기습공격을 펼쳐 적의 집과 창고, 배를 불태우는 등 전공을 올렸기에 이들을 포상해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이조좌랑 김신국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하는데 “이 사건은 체찰사 이원익이 군관 정희현에게 명하여 도모한 것으로 이순신은 그런 내막을 모르고 부하에게 보고받은 대로 장계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원익은 평소 선조에게 “경상도 여러 장수 가운데 이순신이 제일”이라고 할 만큼 이순신을 아꼈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장계를 올렸을 리 만무하다.
이 사건은 오늘날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허위보고를 한 게 아니라 부하의 보고를 확인하지 않고 장계를 올린 ‘실수’로 해석하지만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김태훈씨는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에서 “이순신을 애정의 눈으로 보면 실수려니 할 수도 있지만 선조와 조정은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1597년 이순신을 투옥할 때 선조는 직접 ‘이순신을 죽여야 할 이유’로 3가지 죄를 지목했는데 이 사건은 그 중 ‘조정을 속인 무군지죄(無君之罪)’에 해당됐다.
하지만 죄의 무게로 치자면 두 번째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 쪽이 무거웠다. 그 무렵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역을 하던 요시라는 조선과 일본의 이중간첩으로 활동했다.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와 “고니시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가 바다를 건너올 시기를 알려줄 테니 수군을 이끌고 나가 치라”는 정보를 흘렸다. 조선 조정은 이를 믿을 만한 정보라고 여겨 이순신에게 명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정은 들끓었고, 몸이 단 도원수 권율이 직접 이순신의 출동을 재촉하기 위해 1월13일 한산도로 향했지만 이미 가토 함대는 바다를 건너버린 뒤였다.
‘징비록’은 “이순신이 왜적들의 간사한 속임수(反間計)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여 나아가지 않고 여러 날 동안 머뭇거렸다”고 간략히 기록했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은 이순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체포명령이 내려지고 원균이 새 통제사에 임명됐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정유재란이 터졌다.
<한산도에서 4년을 버틴 까닭>
어떤 이유로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거절했을까. 정두희 교수는 ‘기다림의 전략’이라 했고 김탁환씨는 ‘실용정신’이라 했다. 정두희 교수는 “이순신의 소명의식은 그릇된 왕명에 복종하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데 있었기 때문에 두 차례나 왕명을 묵살하고 마지막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군과 조선군의 전력 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순신은 버티는 전략을 썼다. 당시 상황은 입을 딱 벌린 악어(일본)의 목구멍에 조선군이 틀어박힌 형국이었다. 서로가 죽을 지경인데, 먼저 참지 못하고 움직이는 쪽이 진다. 그래서 이순신은 가토를 잡아오라는 왕명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출동하는 순간 일본군은 뒤에서 치고 들어와 조선군을 궤멸시킬 것이다. 가토를 잡으러 가도 죽고, 항명해도 죽는다. 이순신은 버티는 쪽을 택했다.”
김탁환씨도 “이순신은 지지 않고 이겨야만 했다. 아무리 왕명이라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 따를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순신은 조.일 7년전쟁에서 나라의 운명을 홀로 지탱한 우리 겨레의 영웅이다. 명나라 진린 제독은 "하늘을 날로 삼고 땅을 씨로 삼아 온 천지를 다스릴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천지에 가득 찬 공로 (經天緯地之材 補天浴日之功)"라고 극찬했으며, 일본의 학자 도꾸도미 죠이찌(德富猪一郞)는 충무공을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
朝鮮役(임진왜란의 일본 명칭)에 있어서는 참으로 하나의 이순신으로써 자랑을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는 일본 장수들이 공에게는 기를 펼 수 없었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하여 제일의 영웅이었다."고 솔직하게 극찬했다.
도오고 하이하찌로(東卿平八郞) 는 러.일전쟁의 승리 축하연에서 소감을 말할 때 "나를 영국의 넬슨에게 비길 수는 있으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까지 했다고 한다.(다른 이견도 있음)
그런 까닭에 조정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에 거국적으로 장례를 치루었을 뿐만 아니라,무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忠武란 시호와 宣武一等功臣으로 錄勳되고 德豊君에 봉했으며, 영의정에 추증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 당시에 자신을 "자기만큼 초라하고","복이 없는 사람이며","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였었다.
실로 이순신은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만,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이렇게도 살펴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지"하고 넋두리도 한 평범한 보통 인간이었다.
관련자료
정해관님의 댓글
1)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2)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3)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4)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 제독의 승리는 가장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07년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露西亞 極東艦隊)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일본 해군의 神으로까지 불리는 일본의 도오고 헤이하찌로 제독(提督)은 전승축하연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1785~1805)과 비교하여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나와 나의 함대는 러시아 발틱 함대의 3분의 1규모로서 이겼다 ”
며 결국 자신이 넬슨보다 더 위대하다고 답변하였으나 이어서 다른 기자가 그러면 조선의 이순신 제독하고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순신 제독이 얼마나 대단한 용장이셨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 충무공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새벽에 한성부 남부 건천동(중구 인현동1가 31번지 부근)에서 부친 이정과 모친 초계 변 씨의 오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희신(羲臣)과 요신(堯臣) 두 형이 있고 아래는 우신(寓臣)이 있다. 이들 4형제의 이름은 중국 고대 3황 5제에 속하는 복희씨와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을 따라서 지었다.
이 충무공의 할아버지인 백록(百祿)은 선비였으나,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돼 참화를 입은 탓으로 부친은 평생 벼슬을 외면하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가세가 기울어 어릴 적 대부분을 보낸 고향 건천동을 뒤로하고 외가인 아산 방화산 기슭(아산고을 백암리)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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