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 속의 인물 : 충무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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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되살아난 충무공, 곳곳 '애틋한 가족愛'…
영웅의 인간적 풍모 생생히;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 중 그동안 소개되지 않은 32일치 일기가 발견돼 화제가 되고 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진중일기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1일부터 전사하기 한 달 전인 1598년 10월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는 아산 현충사에 보관돼 있으며 국보 제76호로 지정됐다. 왜적과 대치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일기를 정리해 나간 것에서 이순신의 섬세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일기에는 가족에 대한 심려나 라이벌 원균에 대한 감정 등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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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 통곡하다
‘난중일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군사를 지휘하는 전쟁 영웅 이순신의 모습과 함께 가족을 걱정하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곳곳에 피력되어 있는 점이 흥미를 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와 아들을 잃은 아픔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와 고락을 나누었던 군사들에 대한 애정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백성의 삶을 걱정하는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이순신은 일기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정을 짤막한 문장으로 곳곳에 표현하였다. 1593년 5월4일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고 하였으며, 1594년 5월5일에는 “탐후선이 들어와 어머님이 평안하신 줄 알다. 다행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랫동안 어머님의 안부를 듣지 못하니 답답하다”(1596년 8월12일), “어머님의 소식을 못 들은 지 7일이나 되니 몹시 초조하다”(1595년 5월15일),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종을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오게 하였다”(1597년 4월11일)는 기록들에서는 전쟁 영웅의 모습보다는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보통의 자식 모습이 두드러진다.
1597년 4월13일 이순신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뛰며 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안으로 들어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이야 어찌 이루 다 적으랴.” 4월19일의 일기에는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라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가슴 아파하였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에 아들의 죽음까지 겪어야 했다. 1597년 10월14일에는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이 기록되어 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였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뜯고 영(이순신의 아들)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지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이순신은 일기에서 부인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적고 있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매우 중하다 한다. 그러나 나라 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다.”(1594년 8월30일),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으나 원기가 약하다 하니 걱정스럽다.”(1594년 9월2일), “아내는 불이 난 뒤로 크게 상처를 받았고 담과 기침이 심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1595년 5월16일)
위의 기록들에는 아내의 병을 걱정하는 인자한 남편 이순신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나라 걱정 때문에 아내의 병에 대해서는 최대한 절제하려는 모습도 눈에 띈다.
# 원균에 격한 감정을 보이다
‘난중일기’에는 대표적인 라이벌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격한 감정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원균에 대해 서술한 내용의 대부분은 원균을 비판한 것으로, 이순신도 ‘성웅’이기 이전에 감정을 지닌 ‘인간’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아주 괘씸하였다.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경상도 수사 원균을 나무랐다. 이 모두가 경상도 수사(원균) 때문이다.”(1593년 2월22일), “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하였다. 배 안의 모든 군사들이 분개하였다. 그 망측한 꼴을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원균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전장에서도 원균과는 거리감을 두고 협조하지 않는 상태로 이어졌다. “경상도 수사 원균이 웅천에 있는 적들이 감동포로 들어올지 모른다고 하며 함께 물리치자고 공문을 보내왔다. 흉계가 실로 가소로웠다.”(1593년 6월5일),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치공이 찾아와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해주었지만, 원수사와 그 군관이 본래 헛소리를 잘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1593년 8월7일)
1597년(정유재란) 이순신은 선조의 공격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공을 허위로 보고했다는 이유로 조정에 끌려와 고초를 당하고 결국 백의종군의 길을 나선다. 라이벌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지만 원균은 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이순신은 부하들의 입을 통한 간접화법으로 원균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전한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육지로 달아나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건 차마 입으로 옮길 수 없고 다만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1597년 7월21일)
부하들이 ‘무능한 대장의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 한 표현을 일기에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이순신은 패장 원균에 대해 품었던 분노를 드러냈다.
# 영원한 동반자 유성룡에 관한 기록
이순신은 절친했던 벗이자 형뻘인 서애 유성룡(1542∼1607)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이순신의 형인 이요신의 친구이기도 한 유성룡은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과 교분을 유지했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상당히 신뢰했다는 것은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추천하여 일약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현감이 종6품직이고 수군절도사가 정3품직이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둘의 좋은 관계는 지속되었으며, ‘난중일기’에도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보내 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1592년 3월5일)
“유정승(유성룡)과 지사 윤우신의 편지가 왔다.”(1593년 6월12일)
“순변사에게 유정승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유성룡은 1607년에 죽었으므로 잘못된 소식이었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 이길 길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1594년 7월12일)
“유자 30개를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냈다.”(1595년 9월17일)
이순신은 자신을 알아주는 벗이자 후견인 유성룡에 시종 우호적이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의 우정과 무한 신뢰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또 하나의 힘이었다.
# ‘난중일기’의 자료적 가치
‘난중일기’는 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무장 이순신이 쓴 진중일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치열한 격전이 있던 날도 일기는 거르는 법이 없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도 기록했다. ‘난중일기’를 통해 임진왜란의 구체적인 경과와 전술, 병사들의 심리 등 전쟁의 여러 정황들을 파악할 수 있다. 또 다정다감하면서도 과단한 성격의 소유자인 이순신의 가족애와 부하들에 대해 엄한 장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압박하여 왔던 인물 원균에 대한 기록도 ‘난중일기’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모습은 ‘난중일기’로 더욱 위대하게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어머니와 아내, 아들 등 가족을 걱정하는 인간 이순신의 진솔한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점에서 ‘난중일기’는 단순한 전쟁 일기가 아니라 전쟁의 최일선에서 활약한 장군의 감정과 심리까지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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