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광장
회원논단

소동파와 적벽부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소동파와 적벽부

1. 소동파 (중국 송 [宋] 시인·산문작가·예술가)

(병)Su Dongpo (웨)Ssu Tungp'o.

1036. 12. 19~1101. 7. 28.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산문작가·예술가·정치가.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소순, 소철).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내면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2. [적벽부赤壁賦 解]

임술(壬戌) 가을 7월 기망(旣望)에 소자(蘇子)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서 노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네.

술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명월(明月)의 시를 외고

요조(窈窕)의 장(章)을 노래하니,

조금 있으니 달이 동쪽 산 위에 떠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를 서성이네.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네.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여 그칠 데를 알 수 없고,

훨훨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아 신선(神仙)으로 되 오르는 것 같더라.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니,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삿대로

물에 비친 달을 쳐서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

아득한 내 생각이여,

미인(美人)을 하늘 한 쪽에서 바라보네."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하는 듯,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를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를 울게 하네.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루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하니,

손님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른데,

여기는 맹덕이 주랑(周郞)에게

곤욕(困辱)을 치른 데가 아니던가?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감에,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가니,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었네.

술을 걸러서 강가에 가서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일 진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고 있네.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의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의 좁쌀알이구나.

우리네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부러워하네.

나는 신선을 끼고서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오래토록 하다가 마치는 것을,

불현듯 얻지 못할 것임을 알고,

여운을 슬픈 바람에 맡기네."

소자 말하되 "손님께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시오?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줄고 늘지 않으니,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 하리요?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손님이 기뻐서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고기와 과일 안주가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어지럽네.

얼마나 취했는가,

배 바닥에 우리는 이리저리 되는 대로 누워

서로를 베개하고 깊은 잠에 떨어져,

동녘이 훤히 밝아 하얗게 새어 오는 줄도 몰랐더라.

♣[赤壁賦]

중국 북송(北宋)말의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작품.

1082년(元豊 5) 소동파가 유배지인 후베이 성[湖北省] 황저우[黃州]의 창장 강[長江:양쯔 강]에 배를 띄워 적벽에서 선유(船遊)하면서 지은 것으로, 음력 7월에 지은 〈전적벽부〉와 음력 10월에 읊은 〈후적벽부〉가 있다. 전편은 적벽에서 벌어졌던 삼국시대의 고사를 생각하고 덧없는 인생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한 것이고 후편은 적벽야유(赤壁夜遊)의 즐거움을 구가한 것이다. 소동파 문학의 대표적인 걸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된 중국의 명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조조 [위 태조 무제, 맹덕]

조조(曹操, 155년 ~ 220년 1월 23일)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詩人이다.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시대를 선도한 영웅이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뛰어난 문장가 여덟 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여덟 사람 중, 소순·소식·소철은 부자형제 사이이며, 묶어서 삼소(三蘇)라 부른다.

관련자료

댓글 6

박순철님의 댓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일은 어려워 보여도
어느 수준에 이르면 마음이 절로 작동하여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문제의 수준이 어디인지.....
나는 아직도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만 보입니다.

김명렬님의 댓글

바다와 호수가 있고 배가있고,
산천초목이 우거지고 좋은이들이 옆에있고,
깨달음속에 마음의 자유함이 있으니 그게 곧 천국이로소이다.

이순희님의 댓글

나 관중이 제갈량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역사를 파헤쳐 기록하신 해관님은
오늘 우리홈에 소동파 이십니다.
유익하고 재미있는글 잘 읽었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소자 말하되 "손님께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시오?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줄고 늘지 않으니,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 하리요?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 낼모래 한산섬 달밝은 밤에 정든 님들과 함께 위 구절과 같은 명 싯귀를 음미하며, 그놈의 전쟁 땜에 억울하게 승화하셨던 (예컨대 적벽대전에서, 한산대첩에서, 최근 천안함 46용사들 까지) 분들께 정성으로 준비한 곡차 한잔씩을 올린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여정이 되리라 생각 합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정사 《삼국지》에서는 〈위서〉 무제기에서 적벽대전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매우 간략하게 적혀 있다.

원문 : 公至赤壁, 與備戰, 不利. 於是大疫, 吏士多死者, 乃引軍還. 備遂有荊州, 江南諸郡.
번역 :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상대편 쪽에는 좀 더 자세히 적혀 있다.

제갈량전 손권은 즉시 주유, 정보, 노숙등 수군 3만을 파견하여 제갈량을 따라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서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조조는 적벽에서 패하여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되돌아갔다.

선주전(유비전)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주유, 정보등 수군 수만을보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움을 하여 크게 격파시키고 그의 군선을 불태웠다. 유비와 오의군대는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나아가 추격했다. 그당시 역병이 발생하여 북쪽의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았으므로 조조는 후퇴하였다.

오주전(손권전) 주유와 정보는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을 인솔하여 유비와 진격해 적벽에서 조조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 조조는 남아있는 배에 불을지르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사졸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여 죽은자가 대부분이었다.

주유전 조조의 군대는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질렀다. 바람이 사나와 해안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저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렸다.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