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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과 김부식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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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과 김부식의 일화

1.정지상 (고려 시인) [鄭知常]

?~1135(인종13).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

서경(西京)인으로 초명은 지원(之元).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서경에 두었던 분사국자감시(分司國子監試)에서 진사가 된 후, 서울인 개경(開京)으로 올라와 최종 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준비한 듯하다. 1112년(예종 7)에 과거에 급제하여 1113년에 지방직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1114년 중앙관리로 개경에 올라와 벼슬을 했는데, 이 무렵에 사신의 일행으로 송(宋)나라에 가서 해를 넘기고 체류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1127년(인종 5)에 척준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을 인종이 받아들여 척준경을 유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인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척준경을 유배시킨 그 날로 왕명에 의해 기린각에서 〈서경〉을 강론하고 주식(酒食)을 하사받았다. 1130년 선왕(先王)의 벗이자 총신이었던 곽여가 죽자 왕명에 의해 제문과 〈동산재기 東山齋記〉를 짓기도 했다. 시에서 뿐만 아니라 문(文)에서도 명성을 떨쳐 당대에 김부식과 쌍벽을 이루었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자는 논의와 서경천도(西京遷都)를 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 묘청과 함께 서경천도를 주장했는데, 중앙문벌귀족의 중심세력인 김부식은 이를 강력히 반대해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했다. 1135년 묘청은 인종의 서경천도의 뜻이 미약해지자 성급하게 난을 일으켰다(→ 묘청의 난). 관군 총사령관으로 반란진압에 나선 김부식은 먼저 국론을 통해 정지상·김안·백수한 등이 반역에 가담했으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해 개경에 있었던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체포되어온 그는 김부식의 사명(私命)에 의해 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처사를 두고 후에 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시중(侍中) 김부식과 학사(學士) 정지상은 문장으로 한때 이름을 나란히 했다.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라고 적고, 김부식이 자기에 의해 피살되어 음귀(陰鬼)가 된 정지상에 의해 죽었다는 일화를 실었다.

그는 불교와 도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지니면서 풍수도참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결국 묘청의 난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으나 계속 격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문집으로 〈정사간집 鄭司諫集〉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20수 가량의 시와 7편의 문장이 〈동문선〉·〈파한집〉·〈백운소설〉·〈고려사〉 등에 실려 전한다. 시는 절구에 능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율시가 더 많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현에 뛰어났다. 문자의 수식과 조탁(彫琢)에 비중을 두는 만당시풍(晩唐詩風)을 이루면서도 세속의 번거로움과 갈등을 초월한 맑고 깨끗한 세계를 그렸다. 고사의 인용이 적으며, 감각을 통해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그의 시세계를 두고 후에 홍만종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했다(→송인). 그러나 시어(詩語)가 너무 다듬어져 만당시풍의 시가 가지는 단점도 지니는데, 이를 두고 최자는 "웅휘(雄輝)하고 깊은 대작(大作)은 없다"라고 평했다. 최치원 이후 고려 전기 한시문학을 주도했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2. [정지상과 김부식]

잘 알려졌다시피 김부식은 정지상의 시 쓰는 재주를 시기했다고 하죠. 어느 날 정지상이 지은 멋진 시구를 자신에게 양도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정지상이 수락해주지 않아서 삐쳐있다가 기회가 오자 처치해버렸다는 건데...

어느 봄날 김부식이 시를 지었다죠.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그때 홀연히 음귀가 된 정지상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싸대기를 내갈겼다는 겁니다.

"누가 일천인지, 일만인지 세어봤어?"

그리고는 이렇게 지어야 한다고 훈계까지.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桃花點點紅

김부식이 어느 날 절간에 있는 해우소(화장실)에 갔는데, 바지 내리고 일 보는 중에 정지상 귀신이 나타나 불알을 꽉 쥐었다는 겁니다.

"술도 안 마신 주제에 얼굴이 왜 빨개졌나?"

라고 놀렸으나 김부식은 태연하게,

"언덕에 있는 단풍에 낯이 비쳐 붉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이로써 우리는 고려 시대 뒷간에는 변변한 칸막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쪼그리고 앉은 사람이 언덕에 있는 단풍을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죠.)

정지상 귀신은 김부식의 불알을 더 세게 쥐며,

"이 가죽주머니는 왜 이렇게 물컹대냐?"

라고 놀렸습니다. 하지만 김부식은 이번에도,

"네 애비 불알은 무쇠로 만든다더냐?"

라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정지상 귀신이 결국 너무 불알을 세게 쥔 나머지 뒷간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는 거죠.

이상의 이야기는 이규보가 지은 <백운소설>에 나옵니다. 김부식은 1151년에 죽었고 이규보는 116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 큰 차이가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죠. 이미 당대에 정지상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정지상을 시조로 하는 서경 정씨는 아주 희귀한 성임. 1985년 인구 조사에서 전국에 307가구밖에 없는 극소수 가문이었다 함. 참고로 필자는 하동 정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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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박신자님의 댓글


김부식이 묘청의 난때 정지상부터 죽인것은 사실입니다.
이에대해 김부식이 너무 했다는 평부터..
김부식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평까지..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죠!
그런데..
김부식이 사실 더 억울한것 같네요.
이미 죽은 정지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집중공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니~~~~ㅋㅋㅋ

박순철님의 댓글

인물론이나 작가론은 확실한 고증 자료가 없으면 야사가 되어 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재미는 야사가 훨씬 낫지요.

그래서 정총장님의 그것이 무사한지는 장차 세월이 흘러 인물론의 주인공이 될 때쯤
기록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아들만 셋이니 이제는 없어도 괜찮겠지요?????

조항삼님의 댓글

역사시대에 걸출한 문인으로 풍미햇던 정지상과 김부식의 일화는
해학적인 면에서도 포복절도 하겠군요.

사무총장님의 적나라한 주석을 달매 품격있는 웃음이 폭발됩니다.

이순희님의 댓글

오늘도 역사 공부 잘했습니다.
정지상과 김부식의 이야기를 통해 영계와 육계가 하나임을 느껴봅니다.
귀한글 고맙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연상 공부 중간 점검
1. 글쓰기에 일가견이 있으실법한 이순희님은 유명한 대동강 가 부벽루에서의 과거사를 상기하며 우리 형제들의 글 솜씨를 예찬하고 이 사랑방에 대한 자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2. 알고보니 부벽루에서의 과거사는 고려 때의 이름 난 문인 김황원으로, 그는 ‘古文으로 海東 第一’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文章에 있어서 ‘정지상 이전의 제1인자’로 알려졌습니다.

3. 정지상은 김부식과 함께 고려 최고의 지식인. 정치가. 문인으로서 그의 詩 <送人>(대동강에서 사랑하는 님을 보내며)은 우리 한시 중 ‘송별시’의 최고작으로 꼽히며, 이는 중국 당나라 왕유의 <送元二使安西>와 쌍벽을 이룬다고 합니다.

4. 중국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는 그림에 있어 ‘남종화의 시조’이며, ‘산수전원시의 비조’로 알려 졌습니다. 그의 이별시 <送元二使安西>(안서로 가는 원이를 보내며)는 ‘양관삼첩’으로 유명하고, 그를 일러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라고 평 했습니다.

5. 한편, 정지상과 김부식의 특별한 일화가 화사가들의 흥미를 돋구고, 소동파의 <적벽부>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화두일 것입니다. 내친 김에 <적벽부>에 나오는 曹操 (孟德)은 두 아들을 포함해 3부자가 ‘위진남북조 시대’의 대표 시인이므로 살펴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공부하다가 별 희안한 사실도 발견하게 되네요. '불알'과 '歷史書' 말 입니다.
<史記>의 사마천은 '궁형'을 받았고,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위의 내용과 같으며, <삼국유사>의 일연은 쓰지 못할 불알의 소유자였으니....이쯤되면(발견이) 내가 콜럼버스에 비견된다고 해도 되나???
그리고 이 '사랑방의 史記' 저작자이기를 바라는 나의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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