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史右三>10. 몸과 마음을 바르게 세워 천하구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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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史右三>10. 몸과 마음을 바르게 세워 천하구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다-공자--
공자는 젊은 시절 노나라의 창고를 관리하는 ‘委吏’라는 관직에 있었다. 또 목장에서 가축들을 돌보는 ‘乘田’이라는 직책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별 볼 일 없는 허접스러운 자리 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좋은 실적을 거뒀다. 그 때문에 노나라의 권신이었던 季씨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 나중에는 그의 추천으로 大夫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周나라 천자의 지위는 그 당시 점점 미약해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각 제후들은 정벌전쟁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천하의 禮樂이 붕괴되는 것은 피할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때 공자는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천하를 仁과 禮가 충만한 세상으로 건설해 통일하려고 했다. 에와 법으로 유지되는 질서있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뜻을 품었다. 50세 되던 해에 드디어 ‘중도현의 현령(중도재)’이 되었다. 그제야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칠 기회를 갖게된 것이다. 그는 실제로 中都宰가 된지 1년여 만에 뛰어난 업적을 거두었다. 그러자 사방의 관리들이 그의 노하우를 배우러 모여들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대사구로 승진했는데, 이 자리는 승ㅅ상, 즉 國相을 대행하는 자리로, 그가 마침내 국정을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가 자신 만의 색깔을 가진 정치를 펼친지 겨우 3개월이 지났을까, 노나라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상인들은 투기적인 방법을 이용해 과거처럼 물가를 올리지 않았고, 백성들은 각자 알아서 예법을 잘 지켰다. 따라서 사회질서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노나라를 위해 두 가지 중대한 실적을 이뤄냈다. 하나는 齊나라에 강탈 당한 노나라의 영토를 돌려받은 일이었다. 그것은 제나라와 노나라의 군주인 정공이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 합의한 바 있었다. 다른 하나는 노나라의 3대 권신을 대표하는 계씨와 숙손씨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영토를 분할한 일이었다. 이로써 노 정공의 지위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사실 공자가 국정에 참여한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그의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노력은 이처럼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이때 제나라는 노나라가 강대해지면 궁극적으로는 자국에 불리할 것이므로 노나라의 국력강화를 매우 우려했다. 결국 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조치로, 노 정공에게 ‘미인’을 보내 여색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공은 이후 나라를 다스리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공자는 노나라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운 형세로 치닫자 제자들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자신의 주장을 선전하면서 제후들에게 등용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당시 각 제후국들의 정치는 거의 모두 권신이나 세력이 큰 씨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제후들이 공자를 등용해 자신들의 권력에 칼을 들이대지 않을까 두려워 했다.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당연히 적극적으로 그를 배척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제후국에서 공자를 임용하려는 것까지 은근히 방해 했다. 자신들의 나라에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자에게 해를 입히려는 이들도 있었다. 공자가 衛나라에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위나라 권신들이 무기를 지닌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그에게 공갈 협박을 했다. 그가 宋나라에서 도와 예에 대해 강의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마환발이 한 무리의 병사들을 보내 그를 위협했다. 楚 나라의 소왕이 그를 등용하고자 할 때에도 기를 쓰고 반대하는 승상 자서의 반대에 부딪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공자의 수난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몇 차례나 포위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제후국들을 부지런히 오갔다.
공자는 14년 동안이나 천하를 주유한 다음에야 자신의 주장이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 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노나라로 돌아가 인재육성에 전적으로 투신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데 그의 인재육성 방침은 기존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무엇보다 귀족의 자제들만 공부할 수 잇ㄴ느 전통을 타파했다. 주로 평민 중에서 제자들을 받아들여 재능과 품행이 우수한 인재들을 대거 길러냈다. 그들 중의 일부는 제후들에게 발탁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스승의 뜻을 계속 받들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공자는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분투하며 일생을 살았다. 살아서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우국우민 정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노력,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의지 등은 후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부귀하게 된다 해도 타락하지 않는 숭고한 정신 역시 귀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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