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史右三>8. 이릉의 사건과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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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史右三>8. 이릉의 사건과 사마천
이릉이 흉노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은 술렁거렸다. 최근 대 흉노관계가 여의치 않게 돌아가던 상황이었기에 충격은 예상 밖으로 컸다. 불과 얼마전 이릉의 승리에 일제히 환호하고 축배까지 들며 이릉을 칭찬하고 황제를 찬양하던 모습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들 이릉의 잘못을 거론하고 나섰다. 무제는 답답했다. 먹지도 않았고 조정 회의에서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신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답답한 나머지 무제는 마침내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저는 저의 비천함은 헤아리지 않고 주상의 슬픔과 번뇌를 보고는 저의 어리석은 충정을 다하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보임안서>)
사마천은 오로지 주상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는 마음뿐이었다. 자신의 충정을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매일 똑같은 의견만을 듣는 무제의 답답함을 플어주겟다는 일념이었다. 자신의 말대로 ‘이릉의 공적을 상기시켜 주상의 생각을 넗혀드리고 다른 신하들의 비방을 막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무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건대, 이릉은 평소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 하면서 작은 것도 나누었습니다. 이에 부하들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옛날 명장들도 못하던 것입니다. 몸은 비록 패했으나 그 뜻을 보건대 장차 적당한 기회에 나라에 보답코자 했을 것입니다. 일은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은 천하에 드러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마천의 순박한 충정이 도리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들 눈을 부릅뜨고 희생양을 찾고 있던 마당에 사마천의 이릉변호는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대체 이릉과 사마천은 어떤 관계였기에 이토록 험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솔직한 견해를 밝히며 이릉을 변호 했을까? 최근의 흉노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마천은 몰랐단 말인가?
이광리의 3만 군대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승리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는 무제의 심경을 정녕 몰랐을까?
사실 사마천과 이릉의 관계는 남다를 것이 없었다. 가까운 사이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울 정도였다. 사마천의 말이다.
“저는 이릉과 함께 시중으로 입사했지만 원래 서로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취향이 서로 달라 술을 마신 적도 없고, 친밀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눈적도 없었습니다.” (보임안서)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왜 홀로 나서 그를 변호 했을까?
“그러나 제가 그 사람을 살펴보니 자신을 지킬 줄 아는 남다른 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이 효성스러웠고, 신으로 선비들과 사귀며, 재물에 대해서는 청렴하고, 주고 받음에 공정함을 지키며, 상하를 분별함에는 겸손했고,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언제든지 나라의 위급함에 몸 바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음 속에 쌓아둔 바는 한 나라의 큰 지사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저는 생각 했습니다.” (보임안서)
이러한 인물을 두고 그가 한 일 하나가 마땅치 않다고 해서, 서로 그의 잘못을 들추어 해치려 하였으니 사마천으로서는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재가 한 번 실수를 저지른 것을 두고 들개처럼 달려들어 마구 헏뜯는 조정 신하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 마침 무제의 하문이 있기에 사마천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여기에는 이릉의 할아버지인 이관을 흠모했던 사마천 개인의 감정도 개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술 한잔 마신적 없는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사마천의 행동은 당시 분위기로 보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기질에서 비롯되엇다고 보아야 수긍이 갈 것이다. 거기에 이광과 이릉의 인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무었보다도 자신의 충정을 밝힘으로써 무제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던 사마천의 소박한 희망이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그는 무제를 몰랐다. 무제의 내면세계에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로지 광대한 제국과 군주상에만 집착했다. 그는 자신의 풍부한 식견으로 무제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순진하고 낙관적인 기대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과시를 좋아하고 미신에 빠진 제왕이 갖고 있는 성격의 본질이 끝 모를 ‘의심’이란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다. 자신의 충성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것이 설마 의심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마천의 자만이었고, 역사 전개에 대한 낙관적 생각에 지배당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반고의 말대로 그는 “폭넓은 식견으로도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몰랐으니(<한서> ‘사마천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릉의 변호로 사마천은 결국 사건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98년 그는 황제를 무고하여 심기를 건드리고 황제의 인척인 이사장군 이광리를 은근히 비난햇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고 옥에 갇혔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인 기원전 97년, 이릉이 흉노 선우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공손오의 잘못된 정보가 조정에 전해지면서 이릉의 가족은 몰살되었다. 사마천은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자청하여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힐 수는 없엇으며, 주상께서는 제뜻을 헤아리시지 않고 제가 이사장군을 비방하고 이릉을 위해 유세한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옥에 갇혔고, 저의 충정을 끝내 밝힐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황제를 속였다는 죄로 마침내 하급관리의 재판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저의 집은 가난하여 형벌을 면할 수 있는 돈이 없었고 (당시 50만 전을 내면 감형이 되는 제도) 사귀던 벗들은 아무도 저를 구하려 들지 않았으며, 황제 좌우의 측근들도 저를 위해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습니다...(중략) 이릉은 살아서 항복하는 바람에 가문의 명성을 무너뜨렸고, 저는 거세되어 잠실에 던져져 (성기를 잘린채 남은 부분이 썩지 않도록 따뜻한 ‘잠실’로 보내짐) 거듭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아아, 이런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기>는 이렇게 해서 방향을 바꾸었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고민하고 고뇌하고 고쳐 생각 했다. 그 해. 그 사건은 사마천이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게 했고,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게 했으며, 천명에 대해 의심하게 햇다. 결국 <사기>의 내용과 성격을 송두리째 바꾸는 결정적 게기로 작용햇다.
이런 것을 두고 은명의 장난이라고 하던가? 사마천 개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그 치욕의 산물은 인류에게 둘도 없는 귀중한 선물로 되돌아 왔다.
한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그것을 견디어낸 봄의 나뭇잎은 더욱 푸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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