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10. 韓國佛敎의 특징과 원효의 一心 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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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佛敎의 特色과 元曉의 一心思想
1. 韓國佛敎의 特色
한국불교는 불교의 연기관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발전시킨 특유의 성격을 가진 불교이다. 그런데 과연 인도불교나 중국불교와 변별되며 한국인의 특성이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 한국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근대의 어떤 학자는 “인도와 서역의 불교는 서론적 불교이고, 중국의 불교는 각론적 불교이며, 조선의 불교가 최후의 결론적 불교이다.”라고 하였다. 또 “인도의 원천적 불교, 중국의 분파적 불교에 대하여 한국은 원효. 보조에 의하여 최후의 회통불교를 실현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도나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불교의 특성은 ‘一乘과 一味’의 인식 틀로 전개 된다는 점, 즉 독창성과 더불어 종합성을 강조하는 측면에 있다고 본다. 이를 ‘通佛敎’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예컨대 다른 나라 불교인들의 인식 틀을 보면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 사상가들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어느 종파와 어느 학파에 매이지 않았다. 어느 종파, 어느 학파에 매이지 않았던 근거는 이들의 저술 목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유식불교를 신봉하면서도 개종을 하지 않고 화엄가 내지 정토가로 활동 했으며, 화엄불교를 추종하면서도 천태가나 선가를 겸업했고, 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불설에 입각한 융통성 위에서 자신의 학문적 화두를 밀고 나아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인도나 중국, 일본 사상가들은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한 점은 그들의 교상판석의 틀에서 잘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교판으로 알려진 법상종의 3시교판에서는 요의교로서 <혜심밀경>을, 천태종의 5시8교에서는 ‘법화열반시’를, 화엄종의 5교10종판에서는 대승원교로서 법화보다 화엄을 우위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모두는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제일 위에 오는’ 것처럼 교판을 통해 자기 종파의 우월성을 표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효는 중국의 교판가 들을 향해 “만일 한쪽에만 한결같이 그렇다고 집착하면 두 설을 다 잃을 것이요, 만일 상대를 인정해주어 자기 설만 고집하지 않으면 두 설을 다 얻을 것이다.”라고 갈파한 뒤, 5시 4종으로 판석하려는 견해를 ‘대롱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격’이라고 비판하고 회통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 서양 학자들은 이러한 한국불교의 특성인 통불교의 ‘통’이나 회통불교의 ‘회통’이 “당신들이 즐겨 먹는 비빔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특징은 다양한 개체들이 물리적으로 결합된 비빔밥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삼투된 곰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곰탕은 돼지나 소의 뼈와 살과 양념들이 모여서 무수한 시간 동안 끓는 물속에서 화학적 고투를 거쳐 우러나온 것이다. 이러한 ‘一乘과 一味’의 인식 틀 위에서 정립된 종합성과 독창성이 바로 한국불교의 특징인 것이다.
2. 元曉의 一心思想
元曉(617~686)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불교 사상가이다. 신라 진평왕 즉위 39년에 태어났으며, 일찍 출가하여 불교의 경륜을 깊이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 하였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국내의 연구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에 가서 연구하는 것을 최대의 희망으로 삼고 있었다. 원효도 당시 불교가 크게 떨치던 당나라로 유학할 뜻을 세우고, 34세 되던 해 동지승 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육로로 고구려 요동까지 갔다가 순라꾼에게 잡혀서 간첩으로 몰려 갇히게 되었고, 탈출하여 되돌아 왔다. 그 뒤 10년이 지나서 백제가 망하여 바닷길이 열리게 되자 원효는 또 다시 의상과 함께 구법의 길을 나서기로 하였다. 이 해가 문무왕 원년 원효가 45세 때의 일이다. 신라의 바닷가 당주의 경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큰비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길가의 작은 토굴 사이에 몸을 숨겨서 바람과 비를 피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오래된 무덤의 해골 옆이었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비가 계속 오고 땅은 진창이어서 조금도 나아가기 어려워서 머무르지도 나아가지도 못하여 또 연벽(무덤 속 통로에 깔려있는 벽돌)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밤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괴이한 짓을 하였다. 원효는 “전에 잘 때는 작은 토굴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하여 편안하였는데 오늘 밤에 머무를 때는 귀신들이 사는 곳에 의탁했다고 생각하니 흉조가 많구나. 그러니 마음이 생겨나므로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므로 작은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다. 또 삼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의식이어서(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뒤돌아 짐을 챙겨 신라로 돌아 왔다.
원효는 수학과정에서 일정한 종파나 스승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그는 중관, 유식, 화엄불교를 비롯한 불교의 여러 사상들을 폭넓게 섭렵하였을 뿐만아니라 노장사상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원효의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은 100여부에 이르는 저술에서 그대로 발휘되고 있다. 그가 남긴 많은 저술은 양으로나 질로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초인적인 것으로서 당나라의 학자들이 <해동소>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특히 각승이라고도 하는 그의 <금강삼매경疎>는 당의 학자들에게 <금강삼매경論>이라 불려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명, 용수 등 인도 고승 외에 중국 승려의 저서는 거의 ‘論’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이미 ‘疎’라고 한 것을 중국에서 ‘논’이라고 고쳐 부른 예는 원효의 경우 뿐이다. 그의 삶 역시 엄격한 수행자적 모습과 파계승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교화의 대상과 방식에도 때로는 왕실과 어울려 궁중에서 설법하고 때로는 서민대중과 섞여 함께 춤추고 노래 하였다. 그로 인해 움막 속의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 까지도 불법을 알았다고 한다.
원효는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아, 마음이 일체의 세간, 출세간 존재들을 총섭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마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괴로움과 깨침 또한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중생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며,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은 인간의 마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마음이 있는 그대로의 본래적인 모습(心眞如)이고, 또 하나는 마음의 활동하고 변화하는 측면(心生滅)이다. 문을 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뜻으로 보아 마음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해석한다면, 마음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큰 바다에는 나루터가 없지만 배를 띄워 건널 수 있고, 허공에는 사다리가 없지만 날개를 쳐서 높이 날 수가 있듯이, 실천 수행하는데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일정한 형식이나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사상은 중생에 대한 부단한 관심과 그 스스로 서민대중 속에 뛰어 들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등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無碍行’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아미타 신앙을 비롯한 정토신앙을 통해서 서민대중을 교화해 나간다.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다(女人成佛)”는 주장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成佛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누구라도 자신의 취향과 근기에 맞는 방편을 통해서 진리의 세계에 들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서민대중의 근기에 맞는 ‘정토신앙’을 제시한다. 元曉의 이러한 신앙은 복잡한 사상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없어도 아미타불을 부르거나 생각하기만 하면 되고,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극락왕생 할 수 잇다는 것이기 때문에, 서민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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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원효 대사는 백성들에게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하루는 " 자루 없는 도끼를 누가 맞춰 줄 것인가? 내가 하늘 고일 기둥을 찍을 터인데! " 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이 뜻을 헤아리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태종 무열왕은 원효가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하여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요석 공주를 원효 대사와 연결 시켜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원효 대사가 그냥 부르면 오지 않을 거 같아 묘안을 내었습니다.
바로 군사들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척 하며 원효 대사를 물에 빠뜨려 요석궁으로 데려 가려는 것이었지요.
태종 무열왕의 생각은 꼭 들어 맞았고, 원효 대사는 못 이기는 체하며 요석궁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분황사에서 원효의 설법을 들은 후 원효 대사를 잊지 못하던 요석 공주는 원효 대사를 극진히 모셨으나, 원효는 비단옷에, 사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방랑 생활을 계속하러 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요석 공주가 아이를 낳았으니, 이가 설총이라고 합니다.
<의상과 선묘의 사랑>
의상은 해골물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신 원효와 원래 같이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더 익히려고 하였는데, 원효가 가지 않자 홀로 당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숙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하숙집에는 선묘라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묘는 의상 대사를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선묘는 의상이 파계할 수 없는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의상 대사에게 자신의 간곡한 사랑을 받아 달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의상 대사는 계율을 깨뜨릴 수 없다며 선묘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상은 공부를 마치고 당나라를 떠났습니다.
의상 대사가 신라로 떠난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바쳐 용이 되어 의상 대사가 가는 험한 바닷길을 지켰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에도 바위로 변해 도움을 주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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