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21. 전국 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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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21. 전국 동란
1] 시대개관
무로마치시대 240년 동안, 1467년에 일어나는 ‘오닌의 난’으로 시작되어 약 100년 동안이 전국시대이다. 가마쿠라시대의 무사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장원체제 속에서 세력을 증대시켜 무사사회를 발전시켜 왔지만, 무로마치시대의 무사는 낡은 장원체제를 붕괴시켜 자기들의 다이묘 영국(領國)을 새로이 구축해 왔다. 무사가 다이묘가 되어 각 국을 지배한다고 하는, 중세 무가사회 구성의 마지막 작업을 행하는 시기가 바로 전국시대이다.
‘오닌의 난’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완전히 상실되어, 전국 각지에서 힘있는 사람끼리 서로 영토를 확대하기 위한 전투가 시작 되었다. 붕괴되기 시작한 장원 안에서는 지역마다 농민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마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이 ‘향촌(鄕村)’이라고 하는 새로운 마을이다. 자치조직을 바탕으로 마을의 행정에 임하게 된 농민들은, 세력을 증대시켜 넓은 지역에 걸쳐서 잇키(一揆)를 일으켜 슈고 다이묘들과도 다투게 되었다.
변모해 가는 시대의 파도가 점점 더 높아져 가는 가운데, 낡은 세력은 차례로 붕괴되어지고, 향촌에 뿌리를 내리고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전국시대이다.
2] 종교 잇키
1)렌뇨(蓮如) :
가마쿠라시대에 신란이 개창한 淨土眞宗은, 이 무렵에 잇코슈(一向宗)라고 불리었다. 잇코슈는 호쿠리쿠(北陸)지방을 위시한 지방 농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신앙으로 결합된 다수의 농민들은 다이묘를 타도할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잇코슈를 이렇게 발전시킨 것이 렌뇨(蓮如)였다. 렌뇨는 신란의 가르침을 계승한 위에 알기 쉬운 말로 불법을 설명하면서, 죽은 뒤에 극락왕생하기 위해서 염불을 외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행복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전란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그 무렵 농민들이 각 지역마다 결성하였던 ‘소’라는 자치조직의 회의체 였다. 이 소를 중심으로 설법하여,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더욱 강고한 결합체를 구성해 가고 있었다.
2) 가가의 잇코잇키 :
이들 잇코슈들이 일으킨 ‘잇키(一揆)’ 가운데서 유명한 것이 ‘가가잇키(加賀一揆)’라고 할 수 있는데, 가가잇키가 발생하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히가시오타니(東大谷)에 있던 혼간지(本願寺)는 엔랴쿠지(延曆寺)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렌뇨가 출현하여 혼간지가 새로이 발전하게 되자, 1465년에 엔랴쿠지는 혼간지를 공격하여 이를 불태웠다. 렌뇨는 이러한 공격을 당하자 1471년 에치젠(越前)지방의 요시자키(吉崎)로 옮겨, 이후 이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가가에서는 슈고인 도가시씨가 둘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는데, 이 전투에 가가지방의 잇코슈의 신자들이 응원을 요청받게 된다. 농촌을 지반으로 하는 도착세력은 단합하면 강대해지는데, 소의 회의체를 신앙으로 결속시킨 잇코슈(一向宗)라는 교단은 그 자체가 전투집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앙을 가장 중시하는 렌뇨는 신자들의 전투참가에 반대하였지만, 평소 슈고의 압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농민들은 궐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가가의 잇코잇키(一向一揆)’ 라고 한다.
3) 홋케잇키 :
잇코슈 이외에도 불교는 민중들의 삶에 뿌리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련종(日蓮宗)은 불교의 많은 경전 중에서도 <法華經>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만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주장, 교토의 마치슈(町衆)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일련종은 법화경 만을 신봉하였기 때문에 홋케슈(法華宗)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법화종을 발전시킨 것은 닛신(日親)이었다.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의 강한 성격은 교토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일련종 신자들의 결합도 전국시대 중기가 되자, 교토에서 ‘홋케이키(法華一揆)’를 반복하는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홋케잇키’란 1533년, 관령인 호소가와 하루모토(細川晴元)등이 잇코슈의 혼간지를 움직여서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는데, 잇코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이를 두려워해서 이번에는 잇코슈 신자들과 사이가 나쁜 홋케슈 신자들을 움직여서 탄압하려고 하였다. 홋케슈 신자들은, 교토에 있는 21개소의 사원에서 1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군대에 가세하여, 혼간지를 불태우고 교토에서 세력을 펼쳤다. 이것이 ‘홋케잇키’인데, 그 중심이 되었던 것은 교토의 마치슈들이었다. 그들은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을 선언하기도할 정도로 교토를 지배하였다.
3] 전국시대의 쇼군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시대 말기에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쫓겨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쇼군 집안이 처해 있던 상황을 보자. ‘오닌의 난’이 발생한지 6년째 되던 해에, 요시마사의 아들 요시히사(義尙)가 쇼군이 되었다. 그 뒤에도 전란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쇼군 집안은 몰락해 갔다.
요시히사도 아버지를 닮아서 취미생활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청년이었지만, 영지를 둘러싼 분쟁으로 오미(近江)지방으로 싸우기 위해서 나깠다가 진중에서 25살의 나이에 급사하고 말았다. 이 요시히사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또다시 후계자 문제가 대두 되었다. 그래서, 이전에 요시히사와 쇼군자리를 다툰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의 아들인 요시키(義材)가 쇼군이 되었다. 그러자 정치실권은 요시미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불과 수개월에 그쳐 요시마사가 죽은 1년 뒤에 요시미도 사망하고 말았다.
그뿐아니라, 요시키는 쇼군이 된지 3년 만에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에 의해 쫓겨나고 만다. 마사모토는 간토지방에 있는 요시즈미(義澄)를 세워 실권을 장악하였다.
요시키는, 에치젠 지방의 아사쿠라씨나 스오지방의 오우치씨의 도움을 빌어서 재기를 꾀하였으나, 호소카와 집안의 상속분쟁으로 마사모토가 살해 당하자 오우치씨에 떠밀려 상경하게 되고, 요시즈미를 쫓아내고 다시 쇼군이 된 뒤에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라고 개명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쇼군은 완전히 유력한 다이묘에 좌우되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뒤를 이은 쇼군 요시하루(義晴)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아들인 다카쿠니(高國)가 요시타네를 쫓아내고 세웠던 것이다.
이처럼, 호소카와씨와 오우치씨가 자기들에게 유리한 사람을 쇼군으로 옹립하고자 했던 것은, 명나라와의 감합무역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호소카와씨가 지배하는 사카이의 상인과 오우치씨가 지배하는 하카다의 상인들은 감합무역의 이권을 둘러싸고 싸우고 있었는데, 감합무역선을 보내기 위해서는 쇼군의 국서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도 자기에게 유리한 쇼군을 옹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
센고쿠 다이묘는 슈고 다이묘와는 달리 일본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일국 내의 토지와 백성을 통일적으로 지배한 권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센고쿠 다이묘들의 성과 위에 일본 근세의 바쿠한 다이묘(幕藩大名)는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봉건적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호조 소운(北條早雲) : 서쪽 지방의 야마구치(山口)와 함께, 동쪽 지방의 오다와라(小田原)를 본거지로 하여 간토지방을 제패한 사람이 호조 소운(北條早雲)이다. 호소 조운은, 고호조씨(後北條氏)가 100년 동안 발전하는 기초를 세운 사람으로, 그는 하극상으로 센고쿠 다이묘가 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호조씨의 거성인 오다와라성은 사가미 평야의 서쪽에 있는데, 남으로 바다를 면하였기에 육지와 바다를 통한 보급로를 지니고 있었다. 이 성은 호조 소운의 사후 4대에 걸쳐 크게 확장되었다. 오사카성과 견줄 만한 크고 견고한 성이 되었다. 호조 소운의 사후, 자손들은 간토지방의 8개국을 제압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2)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 호소 조운과 더불어 유명한 센고쿠 다이묘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우에스기 겐신(上□謙信).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사람을 들 수 잇는데, 그 중에서 다케다 신겐은 특히 뛰어난 전략가로 유명하다.
다케다씨는 고호조씨와는 달리, 가이(현재의 야마나시현)지방의 슈고 집안 출신이다. 가이 지방은 남쪽의 이마가와씨(今川氏)와 호조씨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이들의 공격에 대비해야만 하였다. 그는 정략결혼을 통해 자기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였다. 또 그는 부하들의 조직이나 평상시의 훈련에도 주의를 기울여, 전쟁중의 도박이나 약탈행위를 엄격하게 단속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부하들이 지켜야할 규칙을 만들었는데, ‘신겐가법’. ‘갑주법도’ 등으로 불리는 55개조의 자세한 규칙으로 되어 있다.
5] 기독교의 전래
규슈의 남단에 위치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인이 표착한 뒤, 규슈 각지에는 무역을 하기 위해 포르투갈 상인들이 연이어 입항하게 되었다. 상인들만이 아니라, 1549년에는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일본에 와 2년 이상 체재하면서 각지를 돌아 다녔다. 자비에르 일행은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하여 포교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북규슈 지방의 각지를 전전하면서 전도 하였다. 그 뒤, 교토에도 선교를 위해 갔다.
그 결과, 오우치 요시다카(大內義隆).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와 같은 북규슈의 다이묘들이 기독교 신자로 세례를 받았으며, 학교나 교회당을 세우는 등 적극적으로 포교에 나섰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북규슈를 위시하여 주고쿠(中國)지방에서 마침내 기나이 지방까지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런 가운데, 1582년에는 오토모 소린을 중심으로 하는 3명의 크리스천 다이묘가 4명의 소년으로 구성된 사절을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들 소년 사절들은 8년 뒤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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