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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19. 서민의 대두와 오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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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19. 서민의 대두와 오닌의 난

1] 시대개관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였던 농촌은, 남북조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한층 더 진전되었다. 농민들이 지역적으로 결합하여 ‘소’라든가 ‘소손’이라고 하는 자치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농민들의 성장이 마침내는 영주의 불법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그의 처인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는 극도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긴 결과, 막부의 재정은 극도로 궁핍해 졌고 그것은 곧 막부의 권위 실추로 이어져, ‘오닌(應仁)의 난’을 일으키는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11년에 걸친 전란으로 교토는 황폐해 지고, 쇼군의 권위도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공가. 승려 등의 구지배층은 경제적인 수입이 사라지고, 지방의 다이묘들에 의지하기 위해 교토를 떠나는 자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중앙문화의 지방 보급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닌의 난이 미친 여러 가지 영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슈고 다이묘의 몰락과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의 탄생 즉 戰國時代의 개막을 초래한 것이었다.

2] 향촌제와 소의 성립

농민들이 지역적으로 결합하여 소 또는 소손이라고 하는 자치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소의 결합은 반드시 하나의 마을 만이 아니라, 지리적 조건 등의 이유로 더 넓은 지역의 마을이 향으로서 결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촌락 결합을 鄕村制라고 한다.

소의 지도자는 지자무라이(地持) 등으로 불리는 무사적인 성격을 띤 묘슈(名主)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서 반토(番頭). 사타닌(沙汰人). 오토나(乙名) 등으로 불리는 마을의 유지들이 선발되어, 소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요리아이(寄合)라는 회의에 의해 운영되었다.

소는 영주의 대관을 대신해서 연공을 납입하는 데까지 성장 한다. 그리하여 마을은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단위로 행동하게 되었다. 소의 결합은 생산력의 발전이 현저하였던 기나이. 도카이. 호쿠리쿠 지방에서 진전되었는데, 이러한 농민들의 성장이 마침내는 영주의 불법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3] 쓰치잇키와 막부의 쇠퇴

농민들의 지역적 결합이 성장하자, 이윽고 장원 영주나 슈고 다이묘. 무사의 부당한 압박에 대하여 무력봉기를 행사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장봉기를 ‘쓰치잇키(土一揆)’라 한다. ‘잇키’는 “마음을 합하여 행동한다”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잇키가 결성되었던 것이, 농민들도 무사들처럼 잇키를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428년에 발생한 ‘쇼초(정장)의 쓰치잇키’는 최초의 대규모 잇키 였다. 이 해는 전국적으로 기근이 발생하여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지만, 8월에는 오미지방 사카모토의 교통노동자인 바샤쿠가 덕정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그러자 교토부근의 농민이나 시민들이 이에 가담하여 교토 시내에 잇는 도소와 사카야를 습격하여 저당물을 약탈하고 차용증을 파기 하였다.

쓰치잇기가 만연하면서, 쇼군의 권력도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스는 전제권력을 확립하였고, 이를 계승한 4대 요시모치 때, 정치는 일단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5대 요시가즈가 일찍 사망한 뒤, 6대 요시노리 이후 막부의 권력은 쇠퇴하게 된다. 요시노리는 추첨에 의해 쇼군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가마쿠라 구보인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공공연하게 반항하였고, 이에 요시노리는 쇼군권력의 강화를 꾀하여 전제정치를 강행하였다. 그 결과 1438년에 모치우지가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를 ‘에이쿄(永亨)의 난’이라고 한다.

4] 오닌의 난

난 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쇼군 집안의 후계자 문제, 시바(斯波)와 하타케야마라는 두 집안의 후계자 다툼 문제 였다.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29살이 되어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요시미(義視)를 후계자로 정하고 관령인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를 후견자로 하였는데, 다음 해에 부인 히노 도미코 한테서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사 (足利義尙)가 태어 났다. 부인은 요시히사를 쇼군으로 만들기 위하여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을 후견자로 삼았다. 또 이 무렵 하타케야마 집안과 시바 집안에서는 후계자 문제로 내부 대립이 있었다. 1467년 하타케야마씨 내부의 양군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하여 오닌의 난이 시작 되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의 24개국 16만 명의 병력과 야마나 소젠의 서군 20개 국 9만의 병력이 교토를 중심으로 전투를 개시하였다. 다음에 오우치씨가 2만 병력으로 서군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양군은 백중세를 보여 승패는 쉽사리 결정되지 않았다. 교토 거리는 무사들로 넘쳐나고, 교전 상태는 이후 11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격렬한 전투는 처음에만 있었고 그 뒤로는 소규모의 전투가 이어지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전란은 점차 지방으로 파급되어, 슈고의 영국 내부에서도 고쿠진(國人)층의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1473년 양군의 수뇌인 가스모토와 소젠이 잇달아 사망하자 전란은 마침내 진정되기 시작했고, 여러 장수들은 병력을 거두어서 귀국하기 시작해 교토 주변의 전투는 1477년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11년에 걸친 전란으로 교토는 황폐해지고 말았다. 무로마치 막부의 건물이나 덴류지(天龍寺)나 相國寺와 같은 대사찰, 공가와 무가의 저택은 재로 변하고, 사사와 공가의 중요한 보물이나 기록 같은 것도 소실되고 말았다. 공가 승려 등의 구지배층은 경제적인 수입이 사라지고, 지방의 다이묘들에 의지하기 위해 교토를 떠나는 자가 많이 나타났는데, 이는 중앙문화의 지방 보급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닌의 난은 전국시대의 개막이요, 전국시대는 다음에 이어지는 새로운 시대를 낳는 변동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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