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역사10. 탄지마트 개혁 시도
컨텐츠 정보
- 0댓글
-
본문
이슬람역사10. 탄지마트 개혁 시도
점점 약화되어가는 오스만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유럽의 앞선 기술과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무기 기술과 군대제도, 과학과 사회 유연성에서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 비해 너무 정체되고 구태의연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결국 오스만제국은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유럽을 받아들이고 유럽식으로 국가 개조를 시도하게 된다. 일련의 개혁 조치가 시작된 것이다.
1) 튤립시대(1717~1730)
유럽과의 제한적 교류는 다만 오스만 일부 상류층의 생활방식과 군사 기술에서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소위 ‘튤립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에 재상 이브라힘 파샤의 개혁정책으로 궁정생활에서 약간의 유럽화 현상이 일어났다. 유럽식 복장과 유럽식 의식, 그리고 오락이 소개 되었다. 술탄 아흐메트 3세(1703~1730)는 보스포러스 해안과 골든혼에 사치스러운 여름 별장을 짓고, 궁녀들과 어울려 베르사유 궁전의 유럽식 가든파티와 오락을 즐겼다. 술탄과 대신들은 더 이상 높은 벽으로 가려진 궁전 속에서만 살지 않았다.
이때 서구화의 상징으로 빈부에 상관없이 심기 시작한 튤립은 이스탄불 전역을 수놓았다. 그래서 이 시기를 튤립시대라 하고, 오늘 날까지 튤립은 이스탄불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정치. 군사적인 선진 문화뿐만 아니라, 실용 학문과 문학, 풍습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서구 문화가 소개 되었다. 당대의 석학들로 학술 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아랍어 및 페르시아어 고전들을 터키어로 번역하였으며, 토프카프 궁성 안에 엔데룬 왕립 도서관을, 예니 모스크에는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발전은 인쇄술 분야였다. 1727년 최초의 투르크 인쇄소가 문을 열었다. 이로써 학문이 획기적으로 번성하는 틀이 마련되었다.
2) 셀림 3세의 근대화
18세기 오스만의 개혁 노력은 술탄 셀림 3세(1789~1807)의 통치하에서 더욱 가속화되어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흔히 그는 오스만제국 근대화의 시조로 간주되고 있다. 셀림3세가 처음 근위 보병대인 예니체리 부대의 개혁을 시작하자, 예상대로 심각한 반발이 따랐다. 따라서 그는 별도로 니자미 제디드라는 유럽식의 ‘신질서’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완전히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유럽식 군사 조직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규모는 10,000명을 넘지 않았으며,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각지, 유럽 각국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단에 의해 특수 훈련을 받았다. 또 기존 부대의 반발을 고려하여, 니자미 제디드 부대의 예산은 새로운 조세에 의해 충당되었다. 이로써 유럽인 기술자의 감독 아래 무기 공장이 설립되어 소총과 총탄이 제조되었고, 군사 학교가 설치되어 장교들이 양성되었다.
그러나 기존부대의 신식부대에 대한 방해와 적의감도 증폭되어 갔다. 게다가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혁명 정부의 사주에 의한 오스만 변경지대에서의 민족주의 봉기, 1804년에 발생한 세르비아혁명, 러시아와의 새로운 전쟁 돌입 등으로 셀림3세의 군대개혁은 예니체리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론자들은 차차 제거되었고, 신식부대의 역할은 미미해져 갔다. 최후의 정치적 지지세력 마져 잃은 셀림3세는 급기야 보수 연합 세력에 의해 폐위 당하고 말았다.
3) 예니체리의 해체
술탄 마흐무드가 등장한 1808년 말의 오스만제국은 극심한 내란에 휘말리고 있었다. 제국을 살리기 위한 술탄 마흐무드2세의 방책은 내정개혁 이었다. 그의 개혁 골격은 군대의 재건이었다. 술탄의 개혁정책은 당연히 예니체리와의 정면충돌을 야기하였다. 1826년, 술탄은 유럽식 신식군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보수의 온상이고 개혁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에니체리를 과감히 해체하였다. 저항하는 예니체리는 즉각 학살 되었다.
술탄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이 예니체리의 해체를 역사가들은 ‘위대한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책략가로서의 술탄 마흐무드는 셀림3세보다 한 수 위였다. 더욱이 그는 성직자 계층, 즉 울레마들의 절대적 지지를 확보했다. 1807년 개혁 반대 당시 이스탄불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던 예니체리는 1826년 저항에서는 길드(장인조합)의 적극적인 지원만을 얻을 수 있었다. 마흐무드의 군대개혁이 시민과 성직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점은 종래와 같은 위험하고 비이슬람적인 유럽 군대의 모방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고, 오스만 전성시대의 강력한 군대를 재현시킨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예니체리로 대표되는 구식군대는 1831년에 그들에게 주어졌던 티마르 토지제도의 폐지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신식군대 창설은 오스만제국의 다른 분야에서 연쇄적인 개혁을 가능케 해 준 원동력이 되었다. 이중 두드러진것이 중앙집권화의 시도였다. 신식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제개편, 장교의 훈련과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 의과대학의 창설 및 군의관 배출 등과 같은 문제들은 지방정부에 위임되었던 권한을 중앙에 집중시킬 때만이 해결 가능한 과제였다.
4) 탄지마트 개혁(1839~1876)
탄지마트란 술탄 마흐무드2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인 술탄 압둘 메지드1세(1839~1861)와 술탄 압둘 아지즈(1861~1876) 시대에 걸쳐 공표된 일련의 대개혁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러한 탄지마트 개혁의 대표적인 조치는 1839년 귈하네에서 선포된 하트 세리프와 1856년 하트 휘마윤이다. 이러한 개혁 정책의 입안자로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무스타파 레쉬드 파샤(1800~1858)였다. 그는 유럽에서 대사로 봉직하면서 유럽의 근대화를 직접 목격했으며, 외무장관으로서 술탄 압둘 메지드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총체적 개혁을 위한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일종의 신헌법 공표에 해당하는 하트 셰리프의 내용은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의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의 동등한 보장, 징병과 제대의 체계적인 관리, 소득에 따른 공정한 징세, 공개재판에 의한 형 집행 등을 규정하고 있다.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인 1856년의 하트 휘마윤 개혁령에는 학교, 교회, 병원 같은 공공건물의 보수와 신축, 종교와 신앙의 자유,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차별조항 철폐, 비무슬림들의 관리 임용과 교육기회 보장, 공개재판과 고문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스만은 이러한 개혁령을 통해 유럽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제국의 보존을 도모하려 했으나, 유럽국가는 이것을 오스만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탄지마트개혁은 근대화와 중앙집권을 향한 점진적 발전을 계속했으나, 예상되었던 장애요인들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재원과 개혁 전문인력의 부족에다, 전통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혁론자들을 이슬람 정신과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들로 간주했다. 이제 개혁이 큰 위기에 봉착하면서 제국은 걷잡을 수 없는 와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