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10. 섭관정치와 국풍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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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10. 섭관정치와 국풍문화
1] 시대개관
9세기에서 10세기를 걸쳐 후지와라씨는 천황과 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천황을 대신하는 섭관정치를 행하게 된다. 섭관정치에 의해 정치는 사적인 성격으로 변질되고 무기력화 되어 간다. 사회적으로는 공지공민제가 무너져 각지에 장원이 발달 했다. 장원의 증가는 율령제의 붕괴를 가속화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장원에 대한 권리를 유지하고 영내의 농민을 지배하기 위해 무장화가 이루어져 무사의 정치. 사회적 진출이 진행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일본적인 국풍문화가 새롭게 나타난다. 특히 가나(假名)라는 일본문자의 발명으로 사상과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게 되어 많은 문학작품이 쓰여 지게 되고, 건축. 예술 등 모든 방면에 걸쳐 문화의 일본화가 전개 되었다.
2] 섭관정치의 확립
866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정식으로 섭정이 되고 그의 양자 후지와라노 모노쓰네(藤原基經)가 관백이 된 이래, 후지와라 北家의 세력은 급속히 강화되었다.
섭정과 관백은 독자의 관직이 되었다. 섭관정치가 확립됨에 따라, 모든 권력은 섭정과 관백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주요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어, 중앙과 지방의 귀족들은 섭정과 관백에게 줄을 대기 위해 많은 토지나 재물을 갖다 바쳤다. 이로 인해 후에 대토지 소유자인 장원영주도 바로 섭관가에서 나타났다.
한편 섭관가 내부에서는 섭정과 관백의 지위를 둘러싸고 일족 사이에 치열한 쟁란도 일어났지만, 11세기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대가 되면 수습된다. 이리하여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시대에는 섭관정치의 최성기를 맞이한다. 미치나가의 네 딸은 연이어 황후. 황태자비가 되었던 것이다.
3] 장원과 무사
10세기 이후가 되면 점차로 귀족과 대사원의 권위를 배경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조세를 면제 받는 장원이 증가하고, 국사에 의해 면세 받는 장원도 나타났다. 10세기 후반 다이묘다토(다토라 불리는 유력 농민 중 국사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점차 대규모의 경영을 행함)가 각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활발하게 개발을 행했다. 그들은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중앙의 세력가에게 기진하고 그 세력가를 영주로 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러한 기진지계장원은 11세기 후반에 각지로 확대되어 갔다.
헤이안 중기 이후 율령국가 체제의 이완으로 인해 치안이 악화되어 국사나 장원주는 자신의 영지와 재산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무력으로 이를 지켜줄 사람들을 평소부터 양성하게 되었는데, 이를 무사라고 한다. 이들 무사들은 전투를 위해 집단을 형성하는 일이 많고, 일족을 이끌고 무사단으로 성장해 갔다.
4] 국풍문화
대륙문화를 일본의 풍토와 사상에 조화시키려는 문화의 국풍화는 894년 견당사의 폐지 후에는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 전통은 헤이안 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섭관정치의 시기에 그 기초가 다져졌다. 일본에서는 7세기 이래 한반도와 중국의 우수한 문물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흡수해 왔는데, 일본과 대륙과의 관계가 크게 변화한 9~10세기에는 그때까지의 대륙문화의 영향과 흡수를 토대로 하여 일본의 풍토와 사상을 조화시켜 문학과 예술 등의 방면에서 새로운 모습의 문화가 나타난다.
(가나문자의 성립과 국문학의 발달)
가나(假名)는 한자를 사용하여 일본의 언어를 표현할 수 있게한 것이다. 가나는 한자를 의미하는 마나(眞名)에 대응하는 말로 가나의 발명으로 일본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문학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나를 사용한 모노가타리(物語)와 일기 등의 작품이 차례로 나타난다. 모노가타리 초기 작품으로 ‘가구야히메’를 주인공으로한 <다케토리모노가타리>,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모노가타리>등이 유명하다.
(神佛習合의 발전)
神佛習合의 현상은 불교가 전래될 때부터 나타나 이미 나라시대에 진전되고 있었는데 밀교는 신불습합을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여 헤이안시대 중기에는 본지수적설이 형성 되었다.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 : 本地인 부처가 임시로 신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고 하는 사상이다. 예컨대 대일여래를 本地, 일본천황 가문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을 수적이라 하였다.
5] 淨土敎의 발달
정토사상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말하는 가르침이다.
(末法思想) 석가모니의 입멸 이후 敎. 行. 證이 모두 잘 이루어지는 ‘정법의 시대’에 이어서 교.행의 두 법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증과(證果 ; 수행을 통해 깨우침을 얻는 것)를 얻는 사람은 없는 ‘像法의 시기’가 찾아오고, 교법만 있고 행. 증이 없는 ‘말법의 시기’가 온다는 불교교법상의 역사적 말세관이다. 말법의 시대가 끝나면 ‘滅法의 시대’가 된다.
10세기 중엽에 구야(空也)가 교토에서 이를 설하고, 10세기 말엔 겐신(源信)이 <오조요슈(往生要集)>를 저술하여 정토교를 체계화한 이후 정토교는 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정토교는 7세기에 일본에 전해져 내세에 대한 관념을 발달시켰는데, 10세기를 경계로해서 고대 율령제가 붕괴하는 조짐을 보이고 기존의 불교교단이 세속화되고 퇴폐하게 되었으며 거기다 헤이안 말기 전란과 국토의 황폐, 천재지변, 기근, 전염병의 유행 등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을 훈계하기 위한 말법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1052년이 말법의 원년에 해당하는 해로서, 그 때문에 사람들은 내세에서 구원을 바라는 마음에서 점차 정토교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정토교의 발전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극락정토를 현세에 나타내려고 하는 염원에서 아미타당을 세웠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건립한 호조지(法成寺)는 아미타堂을 중심으로 한 대사이고, 그의 아들 요리미치가 세운 平等院 鳳凰堂은 당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당의 내부에는 아미타여래도를 그려 극락세계에의 동경을 표현하였고, 금색으로 빛나는 아미타여래상을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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