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9. 헤이안 초기의 정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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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9. 헤이안 초기의 정치. 문화
1] 시대개관
고닌(光仁) 천황이 착수한 율령제의 재건은 간무(桓武)천황이 계승하고, 정치의 일신을 꾀하기 위해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다. 간무천황은 율령정치를 수정. 보완하기 위해 긴축재정을 취하는 등 일련의 개혁정치를 행했다. 그리고 헤이안 초기에는 율령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문이나 출신 보다는 능력을 중시하여 유능한 관인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후지와라 北家의 진출에 따라 후지와라씨의 권력이 확산되어 섭관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문화적으로 보면 중국의 당 문화의 영향으로 한시나 한문학이 발달하였다. 불교계에서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가 각각 천태종과 진언종을 열었으며, 신비적 요소가 강한 밀교가 발달하였다. 밀교의 발달은 예술방면에 영향을 주어 건축. 조각. 회화 등에 밀교적 요소가 나타나게 된다.
2] 간무조의 성립과 헤이안 천도
770년 쇼토쿠천황의 사망으로 덴지 천황의 후손인 고닌 천황이 즉위하여 혼란한 정치의 개혁을 추진했다. 고닌의 개혁정치는 다음의 간무 천황에 의해 계승되었다. 간무천황은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위해 헤이조쿄에 대신할 신왕경을 조영하고, 귀족 세력을 결집시켜 왕권의 기촐르 확립하려고 했다. 헤이조쿄는 덴무천황의 피를 이은 천황들에 의해 정치가 뿌리를 내린 곳이기 때문에, 덴지계 천황인 간무는 정치의 일신을 꾀하기 위해서도 천도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794년 새로운 왕경으로서 헤이안쿄로 천도 하였다.
헤이안 천도와 함께 간무천황이 직면하고 있던 것은 에미시의 평정이었다. 몇 차에 걸친 대규모의 원정으로 에미시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왕경의 조영과 에미시에의 정토는 국가재원의 심각한 부족을 가져 왔다. 여기에 율령지배의 동요와 조. 용의 미납화는 중대문제 였다. 이에 재전긴축을 위해 불필요한 관리. 관청을 정리 했다.
3] 당풍문화
헤이안 천도에서 9세기 말에 이르는 약 100여 년간은, 새로운 왕도에서 궁정의 번영을 배경으로 다채로운 문화가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는 율령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귀족과 관인에게는 유능한 위정자로서의 교양과 식견이 요구되었다. 이 시대는 문화를 담당한 주체는 귀족이고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나라시대의 덴표문화와 큰 차이는 없지만, 문화의 양상 중에서 2개의 흐름으로 분화하기 시작 했다. 하나는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시. 한문학이 더욱 발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문자의 발생과 목조조각의 발달 등 일본적인 국풍문화의 전제가 되는 여러 조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중에서도 밀교적인 요소가 농후하게 나타난 것도 이 시대의 특색으로, 회화. 조각 등에 독자적인 밀교예술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문화를 미술사상에서는 그 중심적인 사가. 세이와 천황의 연호를 따서 ‘고닌(弘仁).조간(貞觀)문화’라고 한다.
4] 헤이안 신불교
나라시대 말에는 불교가 정치와 결탁되어 부패했기 때문에, 간무천황은 승려의 자격을 엄격히 규제하고 이를 개선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불교계에도 혁신이 일어났다. 그 중심인물은 전교대사 사이초(最澄)와 홍법대사 구카이(空海)였다.
사이초는 오미의 호족출신으로, 처음에 도다이지에서 수계한 후 관승을 거쳐 히에이산에 들어가 수행했다. 그는 불교를 혁신하려는 간무천황의 보호를 받아 804년 견당살르 따라 중국에 들어가 유학하고, 귀국 후에는 천태종을 열어 남도로부터 독립하여 불교수행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특히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인간은 불성에서 평등하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주목 된다.
구카이는 사이초와 같은 해 중국에 유학하여 밀교를 배우고 귀국하여 진언종을 열었다.
석가의 가르침을 경전과 수행을 통해서 깨닫는 일반불교에 대하여, 불교의 교의를 비밀스런 언어로서 설하여 주술적이고 신비적 요소가 강한 것이 밀교이다. 그는 사가천황으로부터 교토의 도지(東寺)를 받아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로 명명하여 밀교의 중심도장으로 삼고, 또 고야산에 곤고부지(金剛峰寺)를 열었다.
※ 신불습합(神佛習合)
불교사상과 신도사상의 융합 중에서 제창된 종교사상이다. 본래는 별도의 종교인 불교와 신토의 일체화를 꾀한 것으로, 나라시대에 출현한 진고지(神宮寺)에 그 기원을 갖는데, 헤이안 시대에 걸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헤이안 시대에는 부처가 신의 본체이고 부처가 민중을 구하기 위해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공덕을 표시한다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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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1) 불교에서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는 불(佛)의 본지신(本地身)이 중생제도를 위하여 여러 가지 다른 것이 되어 나타난다는 뜻. 본래 본·적(本·適) 이문(二門)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며 중국과 한국에서도 있었으나 일본에서 명확히 되었다.
즉 일본의 신(神)들은 불(佛)의 본지신(本地身)의 수적(垂迹)이라고 하는 설로, 나라(奈良) 시대의 행기(行基) 등에 의하여 제창되었다.
(2)신도(神道)에서는 절대적 본체인 본지불(本地佛)이 중생제도를 위하여 화현하여 신기(神祇)로 되었다고 하기 때문에 양부습합신도(兩部習合神道)의 근본원리이다. 이 사상의 맹아(萌芽)는 나라(奈良) 시대에 있던 호법신적(護法神的) 신불혼효사상(神佛混淆思想)으로 주불종신(主佛從神)이라고 하는 경향이 이미 보이고 있다. 이 경향이 점차로 발달해서 신(神)이 중생의 하나로서 불법(佛法)에 의해서 구제된다고 하는 보살신사상의 단계를 거쳐 신은 부처의 화현이라고 하는 사상에 도달하고 여기에 천태진언(天台眞言)의 교리와 결합하여 구체적으로 계통 세워진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 즉 양부신도(兩部神道)가 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중국에서 노자를 가섭보살, 공자를 정광보살의 수적화현이라 하고,
일본에서 아마테라스를 대일여래의 화현으로 보는 등등의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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