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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6. 다이카개신과 고대국가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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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6. 다이카개신과 고대국가의 확립

1] 시대개관

소가씨가 멸망하는 을사의 정변과 다이카개신(大化改新)에서 헤이조코(平城京)로 천도하기 까지의 아스카시대 후반기는 고대국가가 확립되어 가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다이카개신의 이념이 충실히 이행되면서 왕권이 안정되어 갔다는 점이다. 663년 백제 구원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새로 재편된 동아시아의 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당을 모범으로 한 새로운 국가체제를 모색하게 된다. 진신의 난을 통하여 즉위한 덴무(天武)천황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황친정치를 추진해 나간다. 관료제의 합리적인 운영을 위해 여러 개혁을 실시하고, 이를 계승한 지토조(持統朝) 때에는 율령의 편찬, 도성을 조영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수립했다. 문화면에서는 조정의 불교보호정책에 의해 국가불교로 발전하였고, 사원건축. 회화 등의 불교예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2] 을사의 정변

645년에 발생한 소가씨 본종가의 멸망 사건이다. 당을 모방하여 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하려한 이들은, 유교적 혁명사상에 물들어 있는 개혁지향적 인물들로서 나카노오에를 중심으로 한 정변세력들은 645년 외국사를 맞이하는 태극전에서 소가노 이루카를 주살하고 그 일족을 멸망시켰다.

3] 오미천도와 진신의 난

667년 나카노오에 황자는 왕도를 아스카에서 오미(近江)로 천도하였다. 이듬해 나카노오에는 여기서 정식으로 즉위하여 덴지천황이 되었다. 그는 개신정치의 완성을 위해 적극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해 온 귀족. 지식인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각종의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그 사이 신라와 당과의 국교도 회복되어 왕도는 평화와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672년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진신의 내란이 일어났다. 여기서 승리한 오아마 황자는 673년 기요미하라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덴무천황이 된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모든 호족을 제압하고 율령제에 기초한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추진해 나갔다. 천황의 사후는 황후인 지토여제가 그 사업을 계승해 나갔기 때문에, 이 덴무-지토조에는 율령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덴무는 즉위후 종전의 관제를 폐지하고 친정을 행했다. 이러한 황족중심의 정치를 ‘황친정치’라고 한다.

4] 하쿠호(白鳳)문화

시기적으로 645년 다이카개신으로부터 왕도가 후지와라쿄에 있던 710년까지를 말하는데, 이 때 중앙집권국가의 형성을 배경으로 궁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덴무천황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불력에 의해 국가를 수호한다는 생각에서, 국가불교의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왕도에는 국가의 대사원이 세워지고, 아스카 주변의 호족과 지방의 유력자들도 제각기 우지데라(氏寺)를 건립했다.

당시의 예술품으로 야쿠시지(藥師寺)의 삼존상,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 아스카의 다카마스총의 고분벽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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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정해관님의 댓글

[담징의 금당벽화] 사진 위. 아래는 일본의 큰 절 ; 호류지(法隆寺)
일찍이 출가하여 스님이 된 담징은 불교의 경전 뿐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렸으며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에 뜻을 두고 담징이 신라에 머물고 있을 때, 이 소문을 들은 일본은 담징을 모셔 가려고 사람을 보냈다. 담징은 망설인 끝에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예술에 대한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오긴 했으나 담징의 마음은 언제나 조국인고구려에 있었다. 그런데 중국 수나라가 고구려가 돌궐에는 사신을 보내면서 수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지 않은 것을 핑계로 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담징은 고구려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일본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조국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하고는 하였다.
어느 날 일본 스님이 찾아와 담징에게 부탁하였다. " 조금 있으면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사원인 호류사가 완성됩니다. 벽화를 그려야 되는데 부디 대사님께서 그림을 그려주십시오. "

그러나 날로 위험해지고 있는 조국에 대한 걱정으로 담징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괴로움에 쌓여있던 담징에게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크게 물리쳤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담징은불경을 외우며 목탁을 두드렸다. 그리고 호류사로 돌아와 힘을 다해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그리기 시작한 며칠 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림에 그려진 부처의 모습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정말로 살아 있는 부처님 같아. " " 어쩌면 저렇게 훌륭할 수가 있을까 ? "벽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8년 호류사에 불이 나서 벽화는 불에 타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금당벽화는 담징이 그렸던 원래 그림이 아니라, 일본 화가가 담징의 금당벽화를 본떠서 그린 것이다.

담징 ( 579 - 631 )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로서 학문과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
일본의 초청으로 610년에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종이.먹.공예.채색 등의기술을 전하였다. 또한 일본의 호류사라는 절에 머무르면서 불법과 학문을 가르쳤다.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 그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고구려가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자,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호류사의 금당에 <사불 정토도>를 그렸다. '금당 벽화'로 더 잘 알려진 이 그림은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유명했으나, 1948 년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종이와 먹의 시조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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