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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4. 야마토정권의 형성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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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4. 야마토정권의 형성과 전개

1] 고분의 출현과 야마토 정권

3세기 말에서 7세기 초까지의 시대를 고고학상에서는 고분시대라 부르고, 문헌학상으로는 야마토시대라고 말한다. 고분문화는 야마토정권의 형성과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고분은 개인을 매장하기 위한 분묘이고, 야요이 시대의 일반적이었던 공동묘지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들 고분의 조영에는 막대한 노동력과 이를 집약할 수 있는 정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것은 종전보다 한층 커다란 권력을 갖는 왕이 출현한 것을 표시한다.

대외적인 측면에서 야마토정권을 비롯한 각지의 수장층들은 한반도 제국과의 교섭을 통해서 철자원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해 갔다. 그러나 4세기 말 고구려의 남하로 야마토정권은 한반도 남부의 여러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선진문물의 수입이 어렵게 되었고, 이러한 정세 중에서 백제의 요청을 받아 출병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한 야마토정권은, 대송 외교를 통해서 송 황제의 권위를 빌어 고구려 세력을 격퇴하고, 국내적으로는 지방정권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야마토정권은 백제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백제로부터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고, 이들이 생산기술, 금속공예, 말의 사육 등의 각종 기술을 전수했다. 6세기에 들어가면, 백제로부터 오경박사(五經博士)가 도래하는 등 유교의 섭취가 본격화 되었다. 특히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불교는 점차 일본사회에 침투하여 그 생활과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일본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2] 야마토정권의 발전과 씨성제

5세기말에서 6세기에 걸쳐서 기나이를 근거지로 하는 야마토정권은 점차로 지방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야마토정권에 의한 지방 지배의 거점은 미야케였다. 미야케란 원래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수확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의미였던 것이, 창고와 더불어 토지와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인민을 포함한 야마토 조정의 직할령을 말한다. 미야케의 설치에 의해 지방의 수장층에 대한 지배력이 진행된 결과, 이들은 중앙왕권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갔다. 국내의 통일이 진행됨에 따라 야마토 정권의 정치조직도 정비되어 갔다. 야마토 정권은 복속한 소국의 수장을 그대로 새로운 정치조직에 편입시키고 그들이 갖고 있던 토지와 백성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력 호족 가바네(姓)를 하사하여 대왕을 정점으로 한 신분질서를 명확히 하였다.

5세기 후반 이후의 커다란 정치적 변동은 고분의 형태와 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이 시기를 경계로 해서 기나이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방후원분의 규모는 축소하고 그 수도 전국적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야마토 정권이 기비와 쓰쿠시 등의 대호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 광개토왕비와 한일관계

4세기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에 의해 한반도 전체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고구려의 일차적인 공격목표는 백제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이래 대방계를 사이에 두고 만성적인 전란의 상태에 빠졌으며, 371년에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피살 당하고, 평양성이 수차에 걸쳐 공략 당하는 등 백제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고구려는 백제 공격에 이어 그 세력을 신라. 가야의 지역으로 넓혀 한반도 남부 전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이러한 수세적 입장에 있던 백제는 가야제국.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했다. 백제의 대왜관계 성립은 광개토왕의 남정에 의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타개책에서 나온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에 의하면, 왜병의 한반도에의 출병은 신묘년(391), 399년, 400년, 404년 등 수차에 이르고 있다. 출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백제 측의 요청이 주요 요인으로 생각되나, 왜측으로서도 고구려의 남정에 의해 한반도 남부로부터 철자원 등 선진문물의 수입이 제약을 받았던 것도 한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고대국가 형성을 지향하고 있던 왜 왕권으로서는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해서 철자원은 필수불가결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비문의 신묘년조에 의하면,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른바 일본 사학계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의 골격을 이루는 기사로서 주목되어 왔다.

이 후 비면에의 석회 도부에 의한 비문변조설. 고구려를 주어로 하는 독법에 의해 왜의 한반도 남부지배설을 비판하는 연구가 나오는 등 다양한 신설이 제기 되었다.

근년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측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기사로서 이해되고 있다. 고구려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한반도 남부 등 주변 제국에 대한 왕성한 정복전쟁을 통해 고구려 우위의 국제정세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정복전쟁의 결과, 고구려는 주변 제국을 속국 혹은 조공국으로 보는 강한 중화의식이 싹트게 되고, 이것은 곧 비문에 반영되었다.

비문에는 광개토왕에 대한 정복군주로서의 이미지 뿐만아니라, 정복군주의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도덕적 군주상을 기술하고 있다. 도덕적 군주상이란, 대왕이 출병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이유, 즉 정복전쟁의 정당성을 기록하는 것인데, 신묘년조가 바로 그러한 유의 기사라는 것이다.

당시 왜는 고구려의 시야 밖에 있었던 대단히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런 이질적인 집단이 고구려의 세계, 즉 고구려의 속민이 되어야할 백제. 신라에 침입해서 신민으로 삼았으니, 고구려는 이들 지역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바로 남방에 대한 고구려의 출병을 정당화시키고자 만들어낸 전제기사인 것이다.

신묘년 기사는, 전란이 끝난 이후 고구려측 사관의 유교적 덕치주의에 기초한 중화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가 없는 기록으로 생각 된다.

※임나일본부 문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일본 사학계에서 말하는 고대 일본이 임나 즉 가야지역에 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설이다. 지배한 시기는 <일본서기> 신공기에 나오는 일본이 가야 7개국을 평정했다는 369년에서 가야제국이 모두 멸망하는 562년 까지 약 200년간으로 보고 있다.

일제시대 때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가야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고고학적 조사를 한 적이 잇다. 일본이 가야지역을 지배했다고 하면 가야지역에서 당연히 일본제의 물건이 나와야 된다는 것인데, 결과는 찾지 못했다. 당시 조사책임자였던 하마다 고사쿠라는 고고학자는 선입견만 가지고 임나일본부를 논하기 어렵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사실 임나일본부란 용어는 <일본서기> 이외에는 어떠한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보다 불과 8년 앞서 편찬된 <고사기>(712년 편찬)에도 보이질 않아,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의 편찬사관에 의해 내용상의 과장, 윤색이 가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후 남.북한 사학계에서도 새로운 가설이 제기 되었다. 북한학계에서는 일본열도에 이주한 가야인들이 세운 분국을 야마토정권이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 아닌가 추정하였고, 국내 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란 일본이 가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지배한 것이고 <일본서기>가 이를 개변했다는 설도 제기 되었다. 보다 진전된 일본측 학설로서 일본에서 가야지역에 파견된 관인설(在安羅諸倭臣)에 기초해서 왜신들은 가야의 지배층과 합의체를 이루며 가야문제에서 발생하는 공통의 이해를 해결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설이다.

근년에 들어서는 가야지역에 대한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가야사의 실체에 윤곽이 드러나면서 가야의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역사상이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접근되고 있는 공통의 인식은, 시기적으로 6세기 전반대, 장소는 함안의 안라국을 무대로 국제관계상의 문제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전환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5세기 후반대의 한 예를 제외하면 540년대에 한정되어 있고, 이른바 일본부 관인들의 활동도 이 시기에 나타나며, 특히 가야제국을 둘러싸고 국제간의 이해관계가 심각했던 시기였다는 데에 공통의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의 실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540년대 안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부 관인들의 성향을 알아보는 일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열도에서 파견된 관인 같이 되어 있으나, 실제는 그 주도 세력은 가야인이고 여기에 왜계 가야인 혹은 왜의 사신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서 당시 긴박했던 국제정세 하에서 가야의 안정과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특정국이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왜로부터 파견된 사람들 역시 가야측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실리외교를 전개하엿다. 당시 가야제국은 동서의 신라와 백제로부터 정치. 군사적 위협에 놓여 있었던 시기라, 임나일본부도 가야제국을 둘러싼 긴박했던 국제관계 속에서 자국의 안전을 보존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났다는 점은 확인되었다고 생각 된다.

일본의 신화

일본신화의 특색은 천황가 선조의 신들이 중심이 되어 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신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파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천상계에 있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 라는 여신이다. 천상계를 보통 다카마가하라(高天原)라고 한다. 이에 대해 지상계에서 큰 세력을 갖고 잇는 것은 스사노오노미고토와 그 아들인 오쿠니누시노카미인데, 몇 차례의 교섭 후에 오쿠니누시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던 지상의 국을 아마테라스 한테 헌상한다. 이 지상의 국을 아시하라노나카쓰쿠니라고 한다.

아마테라스는 지상의 국을 다스리기 위해 그의 손인 니니기노미코토를 다카마가하라로부터 하강시킨다. 니니기는 규슈에서 휴가의 다카치호봉으로 내려가 토지신의 딸과 결혼 한다. 그 3대 째에 태어난 이와레히코노미코토는 동쪽의 좋은 토지가 있음을 듣고 휴가를 떠나 세토 내해를 거쳐 나니와에 상륙한다. 그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은 후, 야마토를 평정해서 우네비산의 기슭인 가시하라에서 즉위하여 초대 진무(神武)천황이 된다.

이상이 일본의 건국신화의 개요이다. 물론 신대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천황가의 선조들이 야마토로부터 규슈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던 것은 6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신화의 성립의 배경에는 천황의 일본국 통치의 유구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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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이판기님의 댓글

올만에 홈에 들어와 정박사님의 일본역사 연재를 보고 기뻐서 훔쳐갑니다. 예부터 책도둑은 도적이 아니라고 했으니 걍 찍어 냈지요. 물론 여러 경로로 일본역사를 수박 걷 핧기를 했으나 간결하면서도 한반도와 비교하며 전개된 내용이 좋아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십 몇회인가 엽치없이 훔치러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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