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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3. 농경사회, 야요이문화와 야마타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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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3. 농경사회, 야요이문화와 야마타이국

1] 야요이문화

조몬시대라고 하는 수 천년 간 지속된 일본의 원시사회에 대변화를 초래한 것은 농경문화의 유입이었다. 한반도 남부로부터 유입된 농경은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종전의 수렵과 채집. 어로에 의한 자연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 바뀌고,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잉여농산물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정한 경지를 단위로 하는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적 수장이 출현하게 되었다. 몇 개의 집단을 종속시킨 유력 수장은 지역적 맹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정치적 수장에게는 경지의 개발, 제사의 주관 등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야요이식(彌生式) 토기: 1884년 동경의 야요이초의 패총으로부터 호형(壺形)토기가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지명을 따서 야요이식 토기로 명명하게 되었다.

2] 야마타이국과 동아시아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 의하면, 일본열도의 여러 소국은 2세기 후반에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 여러 소국은 보다 큰 세력에 흡수, 통합되어 30여국으로 줄어들고, 이들 30여국의 수장들은 히미코라 불리는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의 여왕을 공립하여 대란은 수습되고 평온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히미코를 군주로 하는 정치적 통합체는 전체로서는 예속한 제국의 주체성이 강하고 통합의 유대도 강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통합의 주요한 수단이 주술적. 종교적 권위였기 때문에, 이러한 권위가 흔들릴 때는 언제든지 연합정권이 해체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여왕 히미코는 239년 대부 난승미를 대방군에 파견하고 중국의 위 황제에의 조공을 구했다. 대방태수는 난승미를 낙양으로 안내하여, 명제로부터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자수와 거울을 하사 받았다.

245년경 한반도 남부의 여러 세력은 연합해서 대방군을 공격하여 태수인 궁준을 살해했다. 이즈음 왜국에서는 야마타이국의 히미코와 규슈 남단의 구노국 간에 전쟁이 일어나 여왕은 급히 대방군에 구원을 요청했다. 247년 대방태수의 사자인 張政은 위 황제의 조서와 황당(軍旗)을 왜국에 갖고 와서 격문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히미코는 이 전쟁의 와중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히미코의 사후 연합왕국은 혼란에 빠져 전쟁이 일어났으나, 히미코의 종녀인 이요(壹與)를 세워 진정되었다고 한다. 265년에 중국에서는 위 왕조에 대신하여 서진이 들어서자, 이듬해 왜 여왕은 진 왕조에 조공하였다. 이후 약 150여년 간 중국 기록에서는 왜국의 동향을 전하지 않는다. 야마타이국 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던가는 알 수 없지만, 4세기 이후 진 왕조의 쇠퇴와 더불어 점차 해체의 길로 빠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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