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20.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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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 남으로 창을 내겠소
金尙鎔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문학> 2호 (1934. 2)
우리나라의 田園詩에서 白眉篇으로 손 꼽히는 작품. 자연으로 돌아가 自然愛와 생의 靜觀에 유유자적하는 것은 동양인의 오랜 전통적인 바탕이다. 이 시는 시인의 욕심 없는 세계가 인생론적으로 들어나고 있다. 고시조에서 볼 수 있는 동양적인 은둔사상도 배어 있으며, 민요조의 소박하고 친근한 가락에다 전원으로 돌아가서 모든 영화와 야심을 버린 삶을 영위하려는 태도를 접할 수 있다.
특히 제3연 ; 혹 친구가 와서 이런 전원적. 목가적인 무위의 삶을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씩 웃는 것으로 대답하겠소.
-詩想이 가장 압축된 연. 백 가지 대답이 필요 없이 웃고 말겠다는 그것은 인생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자의 達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李 白의 시 <山中問答> ‘대답 않고 빙긋이 웃어주니, 마음 절로 흥겹소(笑而不答心自閑)’와 거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 준다.
[金尙鎔 1902~51] 호는 월파. 경기도 연천출생. 보성고보를 거쳐 일본 릿교대학 영문과 졸업. 이화여전 교편 잡으며, ‘30년 <무상>,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을 발표. 미군정으로부터 강원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 이화여대 교수. 시집에 <망향>1939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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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시인·영문학자.
주로 전원적이며 목가적인 삶을 읊었다. 본관은 경주. 호는 월파(月坡).
아버지 기환(基煥)과 어머니 나주정씨(羅州丁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조시인 오남(午男)은 그의 여동생이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어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1921년에 졸업했다.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 1927년 졸업 후 귀국하여 가족과 함께 고향인 연천을 떠나 서울 성북동으로 이사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에 따라 영문학과가 폐지되자 1943년에 그만두었다. 8·15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서 강원도지사로 임명되었으나 며칠 만에 사임하고, 1945년 개칭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후, 1949년에 돌아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겸 학무처장을 역임했다. 〈코리아 타임스〉의 주필을 맡아보았으며,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가 1951년에 식중독으로 죽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시 〈무상 無常〉·〈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30 년대 우리나라의 문단 전반에 흐르고 있던 순수 서정시 운동과 맥을 함께 한 그의 시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읊었던 청록파 시인들과는 다르다. 전원적 삶을 대상으로 '나'와 '자연'의 화해, 자연의 품에 안긴 삶을 지향했다. 대표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는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 그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신석정·김동명과 함께 3대 '전원파' 시인으로 불렸다. 1939년 첫시집 〈망향〉을 펴냈고, 죽고 난 뒤 〈김상용 전집〉(1983)·〈남으로 창을 내겠소〉(1986) 등이 나왔다. 인생과 사회에 대한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보여준 수필집 〈무하선생 방랑기 無何先生放浪記〉(1950)를 펴냈고, 그밖에 E. A. 포의 〈애너벨 리〉(신생, 1931. 1), J. 키츠의 〈희랍고옹부 希臘古甕賦〉(신생, 1931. 5)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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