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13. <접동새>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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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13. 접동새
金素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배재>2호(1923.3)
※ 소월의 조숙 : 33세로 요절한 김소월의 작품은 거개가 18, 19세 전후에 씌어진 것이다. 이때 그의 신분은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졸업(1919) 무렵에 집에서 2년을 쉬다가 배재고보 졸업반에 편입(1922)한 학생이었다. 그는 이미 오산중학교에서 은사 김 억으로부터 민요풍의 시작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 기간을 지나 죽기 전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은 ‘다시 잡기 힘든 돈만 좀 놓아 보낸’(김 억의 소월 추억)시기로 작품과는 등한해 지고, 그는 세파에 휩쓸려 고전을 겪는다.
<접동새>는 배재고보 시절의 작품. 당시 연령은 21세.
※아우래비 ; 아홉 명이 되는 여자의 남동생. ‘아홉 + 오래비’의 유포니(Euphony)현상.
오랍동생 ; 여자가 자기의 사내 동생을 일컫는 말.
[金素月 1902~34] 본명 정식. 평북 정주 곽산면 출생. 오산학교 거쳐 배재고보 졸업. 도쿄 상대 입학시험에 실패. 1922년 김 억의 주선으로 처녀작 <꿈자리> <먼 후일> <진달래> <님의 노래> 가 ‘개벽’에 발표되어 천재적 시재를 보임. 소학교 교사, 신문사 지국장 등을 지냈으나 실패를 거듭한 끝에 33세 나이로 음독 자살함.
관련자료
정해관님의 댓글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1902년 8월 6일에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소월 김정식 시비. 서울 남산공원 소재.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다.
1934년 12월 24일 곽산에서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후 43년 만인 1977년 그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 중에 스승 김억의 시로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둔갑시켜 발표했던 것이다.
198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다.
작품 경향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평가
조연현은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면서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이라고 평했고,[1] 조병춘은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이라고 했다.[2] 김현은 김소월의 시가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고 했으며,[3] 유종호는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이라고 했고,[4] 김용직은 김소월을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라고 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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