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12.<月光으로 짠 病室 >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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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12. 月光으로 짠 病室
朴英熙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굴으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의 한숨은
갈 바를 몰라서 애궂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은 남 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 발 한 발 걸어오는 달님의
정맥혈로 짠 면사 속으로서 나오는
병든 얼굴의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 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문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 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마한 병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짜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 같이 비인 나의 마음은
이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이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이 때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이라 부르나이다.
그들의 손은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백조> 3호 (1923. 9)
白潮派의 문학을 흔히 夢幻의 문학이라고 한다. 이는 그들이 현실감각에서 유리, 현실도피적이고 詠嘆調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백조파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이 懷月의 시라는 사실이다. ‘꿈의 나라로’, ‘유령의 나라’, ‘월광으로 짠 병실’로 대표되는 그의 시는 현실생활과 전혀 무관한 곳이거나, 시종 감상으로 얼룩진 현실 도피의 한 본보기를 이루어 놓았다.
[朴英熙(1901~?)] 호는 회월. 서울출생. 후에 카프(KAPF)의 쌍벽을 이룬 팔봉 김기진과 배재고보 동창.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수업. <장미촌> <백조> 동인. 백조가 붕괴되면서 신경향파 문학이 대두하자, 이어 카프의 핵심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견해가 대립되자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1934)라고 선언하고 다시 순수문학으로 복귀. 저서로 시집 <懷月詩抄>외에 <소설.평론집> <문학의 이론과 실제> 등. 1950년 납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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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시절에 김기진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으며,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하다가 가정 사정으로 인해 1921년 귀국했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장미촌〉의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고, 최승일·나도향 등과 〈신청년〉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1922년 박종화·나도향·이상화·현진건 등과 〈백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나. 1923년 통권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한 김기진과 〈백조〉의 해체를 주도했다. 같은 해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했고, 1924년 개벽사의 문예부 책임자 및 〈중외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했다. 1925년 8월 23일 카프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후 프로 문학의 대표적 이론가로서 주도권을 확립했다. 1927년 당시 사회운동의 방향전환에 따라 목적의식론을 제창해 문예운동의 방향전환을 주도했고 신간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1929~30년 임화를 비롯한 소장파들이 도쿄[東京]에서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중심적 위치에서 물러나 1931년 이후 순수예술을 주장했다.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사건 때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가 1933년 카프에 탈퇴원을 제출하고 1934년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상실한 것을 예술 자신이었다"라는 유명한 선언문을 남기고 전향했다. 1934~35년에 계속된 카프 제2차 검거사건 때는 1년 정도 복역한 뒤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사상범보호시찰법에 의해 1938년 7월에 열린 전향자대회에 참가했고, 1939년 10월 친일문학가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창씨개명해 일제의 신체제문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친일행위로 인해 해방 후 민족반역자 명단에 올랐으며 서울 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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