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 게시판

제2회 피스퀸컵 개막전, 뉴질랜드에 역전승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emoticon_15.gif 한국, 피스퀸컵 개막전서 뉴질랜드에 2-1 역전승

[OSEN=수원, 우충원 기자]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피스퀸컵 개막전서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안익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14일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8 피스퀸컵 수원 A조 개막전 뉴질랜드와 경기서 전반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후반 권하늘과 박희영의 연속골에 힘입어 2-1 역전승을 거두었다.

북한 대신 이번 대회에 참가한 뉴질랜드는 체력적 우세를 바탕으로 미드필드 진영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시도했다. 리니 레오타를 최전방 공격수로 내세운 뉴질랜드는 빠른 패스 연결을 통해 한국의 수비진을 공략했다.

한국은 뉴질랜드의 파상공세를 잘 막아내며 상대 공격수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도 박희영과 이은미 그리고 차윤희로 이어지는 공격진이 뉴질랜드 골문을 열기위해 동분서주 했다.

선제골의 주인공은 뉴질랜드였다. 한국 진영 정면서 문전으로 로빙볼이 올라왔을 때 오프사이드를 피해 볼을 잡은 리니 레오타가 우측 골라인서 내준 볼을 문전으로 쇄도하던 크리스티 얄로프가 차넣어 1-0으로 앞섰다.

선제골을 득점하며 기세가 오른 뉴질랜드는 더욱 강하게 한국을 몰아쳤다. 중원 허리싸움서 뉴질랜드에 주도권을 뺐긴 한국은 특별한 찬스를 만들지 못하며 전반을 마쳤다.

한국은 후반서 반격에 나섰다. 전반보다 많은 활동량을 선보인 한국은 후방에서 연결되는 롱 패스를 주무기로 뉴질랜드 공략에 나섰다.

후반 12분 한국의 차연희가 후방에서 날카롭게 연결된 패스를 이어받아 골키퍼와 일대일 단독 찬스를 얻었지만 선방에 막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또 차연희는 4분 뒤 골키퍼와 맞서 강한 왼발 슈팅을 시도했지만 골대를 살짝 벗어났다.

적극적인 공격을 시도한 한국은 후반 23분 동점골을 터트렸다. 공격을 이끌던 차연희가 문전으로 단독 돌파한 뒤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권하늘에게 볼을 연결했고 이를 가볍게 차 넣어 1-1을 만들었다. 기세가 오른 한국은 2분 뒤 역전골을 뽑아냈다. 후방에서 연결된 권하늘의 긴 패스를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골문으로 쇄도하던 박희영이 잡아 2-1 역전에 성공했다.

개막전 승리를 눈 앞에 둔 한국은 끝까지 공격을 집중했다. 뉴질랜드 선수들의 움직임이 둔화되자 한국은 빠른 돌파를 시도하며 압박을 통해 추가골을 노렸다. 하지만 한국은 안정적인 경기 운영으로 뉴질랜드의 반격을 막아내며 승리를 챙겼다.

한편 이날 개막전에는 열린 수원 월드컵경기장에는 3만 6465명이 입장해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을 위해 힘찬 응원을 보냈다

관련자료

댓글 1

정해관님의 댓글

축구의 역사와 발전
전 세계의 축구의 인기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축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인 나라들은 초록색으로, 축구가 인기있는 스포츠가 아닌 경우는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초록색과 빨간색의 다양한 색의 명암은 거주자 1,000명 당 축구 선수의 숫자를 가리킨다.역사를 통틀어서 공을 차며 돌아다니는 형식의 게임은 오래전부터 많은 나라에서 행해졌다. FIFA에 따르면, 게임의 가장 이른 형태는 기원전 2,3세기경 중국에서 행해진 현재의 축구와 비슷한 형태인 츄슈(蹴鞠 축국)이라고 한다.[6] 한편, 고대 그리스에는 기원전 7∼6세기 무렵에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에피스키로스(επισκυρος)라는 공을 차고 던지는 간단한 형식의 놀이가 있었다.[7] 고대 로마에서 행하진 공놀이의 한 형태인 하르파스툼은 축구의 먼 친척일지도 모른다고 한다.[8]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축구는 중세 유럽 곳곳에서 행해졌다.

현대적 규칙의 축구는 잉글랜드 사립학교(public school)들에서 행해지던 광범위하고 다양한 형태의 풋볼을 표준화하려 한 19세기 중반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1848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처음 작성된 케임브리지 규칙은 뒤에 현대 축구를 포함한 규칙들의 발전을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케임브리지 규칙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4개 단과대학 중 하나인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여러 학교(이튼, 해로, 럭비, 윈체스터, 슈루즈버리 등)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작성되었다.[8][9] 이 규칙은 현대 축구의 규칙과 거의 유사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처음엔 보편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1850년대 사이에 이르러, 여러 학교 또는 대학교에서 분리되어 다양한 형태의 축구를 하는 많은 클럽이 영어권 곳곳에 형성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857년에는 세계 최초의 축구 클럽인 셰필드 FC가 사립학교의 졸업생들에 의해 창단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셰필드 FC 창단을 발판으로 셰필드 FA가 1867년에 창립되었다. 셰필드의 창단은 원시적이던 당시의 축구를 현대 축구로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8][10] 또한 1862년에는 어핑엄 스쿨의 존 찰스 스링이 영향력 있는 한 세트의 규칙을 고안해냈다.[11]

1863년 10월 26일 런던에 있는 학교들과 스포츠 클럽들은 프리메이슨 테이번이라는 펍(Pub, 선술집)에서 축구 규칙의 통합을 위해 모였다. 처음에는 제각기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해 12월까지 5번 정도 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점점 하나의 이견으로 좁혀졌고, 여기에서 현대 축구의 첫 번째 공식 규칙이 만들어졌다. 또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축구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약칭 FA)의 설립에도 합의하였다.[7][8][12] 그러나 규칙의 최종본에서 '공을 들고 뛸 수 있다', '뛰는 상대를 막을 수 있다(상대의 정강이 차기, 발 걸기, 잡기 등)'등의 두 가지 규칙이 제외되면서 이에 반발한 블랙히스를 포함한 몇몇 팀은 FA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때 FA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거나, 그 뒤에 FA를 탈퇴한 클럽들이 모여 1871년 런던에서 럭비협회(Rugby Football Union)를 만들었고,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스포츠는 오늘날의 럭비(럭비 유니온)로 이어진다. 11개의 남은 팀들은 에브니저 코브 몰리(Ebenezer Cobb Morley)의 주관으로, 게임의 원래 13개 규칙을 비준하는 일을 계속했다.[12] 당시의 규칙은 공에 대한 핸들링을 허용하고 크로스바도 없는 형태였는데, 그 규칙은 당시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달하던 빅토리안 풋볼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한편, 셰필드 FA는 FA가 그들의 규칙을 흡수하기도 하면서 경기 규칙 간에 차이가 별로 없던 1870년대까지, 독자적인 규칙에 따라 경기를 진행했다.


제1회 FIFA 월드컵(1930년) 포스터오늘날 축구 경기 규칙은 국제축구평의회(IFAB)에서 규정하고 있다. 평의회는 스코틀랜드 축구협회와 웨일스 축구협회, 아일랜드 축구협회가 참여한 가운데 맨체스터에서 1886년 설립됐다.[8] 가장 역사가 오래된 축구 대회는 FA컵으로, C.W. 얼콕이 세워 187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팀이 참여하여 자웅을 겨루는 대회이다. 첫 공식 국가대표팀 간의 국제경기는 1872년에 글래스고에서 벌어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이며, 이 또한 얼콕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잉글랜드는 세계 최초 축구 리그인 풋볼 리그(Football League)의 발상지이기도 한데, 이 리그는 당시 애스턴 빌라의 중역이었던 윌리엄 맥그레고에 의해 1888년 설립되었다. 초기의 시스템은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의 12클럽이 참여하는 식이었다. 축구에 관한 일체의 국제행사를 관장하는 국제축구연맹(FIFA)은 190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설립되었다.[8] 그러나 축구 국제경기가 대중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국제축구연맹은 1913년에 국제축구평의회(IFAB)의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국제축구평의회는 현재 4명의 국제축구연맹 의원과 영 4개국 축구협회에서 각각 한 명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0년에는 제1회 FIFA 월드컵이 시행되었다.


축구를 즐기는 아이들오늘날 축구는 프로축구의 형태로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축구 경기장을 찾으며 자신들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고,[13] 수십억의 인구가 텔레비전으로 축구를 시청한다.[14] 수많은 사람 또한 아마추어 레벨에서 축구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국제축구연맹이 주관한 조사에 따르면, 2억 4천 명 이상의 인구가 200여 국가에 걸쳐 정기적으로 축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5] 축구의 간단한 규칙과 적은 경기 필수품이 축구의 확산과 대중화에 기여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축구는 많은 팬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특정 지방 혹은 전 국가적인 사랑을 받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인기있고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주 언급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독일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선 축구경기를 열고자 잠시 휴전했다. 또, ESPN의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 중계로 2005년에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이 휴전된 적도 있다. 그리고 코소보와 카불에서는 전쟁이 종식되고 나서 사회가 정상화되는 첫 번째 신호가 축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축구가 전쟁의 원인이 된 적도 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 전쟁이 바로 축구가 발단이 된 전쟁이었다.[16][17] 축구는 또한 NK 디나모 자그레브와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경기가 폭동으로 번짐에 따라 199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격화시키기도 했다.[18]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