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쉼터

안변 석왕사의 뒷간이 얼마나 높길래...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안변 석왕사의 뒷간이 얼마나 높 길래...

멀고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북쪽 함경도 안변의 석왕사에는 ‘뒷간(해우소)’이 높기로 유명했고,

남쪽 순천의 송광사에는 크고 넓은 ‘가마솥’이 유명했다.

양쪽의 스님들도 상대편의 것에 대하여 소문만 들었을 뿐 그 실체를 알 수 없어 궁금하던차, 필자와 같이 호기심 많은 대표 스님들께서 ‘지피지기’ 차원에서 상대의 것을 확인하고자 먼 길을 떠나게 된다.

둘은 함경도와 전라도의 중간 쯤인 (아마도) 보은의 속리산 부근 여관에서 만나게 된다.

통성명 후 여행의 목적을 확인하자, 갈 길은 먼데 다리는 아프지, 노자는 떨어졌지, 또 가서 확인한들 별 실익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둘은 상대방의 ‘사실적인 얘기’를 통해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하였다.

송광사 스님 왈

“거시기, 우리 절에 있는 구시(가마솥)는 요, 을매나 큰지 한번 들어 볼라요. 그렁깨 오는 단오에 팟죽을 쒀서 불자들한테 줄라고 하는디요, 지가 절을 떠나오기 한 대여섯달 전에 주지시님께서는 구시 안에 있는 배를 타고 나가서 팟죽을 휘젓고 있는디, 아마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을 것이구만요”

석왕사 스님 대꾸하기를(필자는 함경도 말씨를 모름)

“과연 소문대로 귀 절의 가마솥은 매우 크겠군요. 저희 절의 뒷간도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만 하지요. 한 사나흘 전 주지스님께서 큰 일을 보셨는데,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결국 두 스님은 어느쪽의 것이 큰지 확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누구의 풍이 더 센지도 판단하기 어렵고...요즈음 북쪽의 안변에서 미사일인가를 만지작거리는 모양인데, 예부터 그리 큰 뒷간을 묻어서 숨기기 좋은 곳인가???

석왕사 ( 釋王寺 )

함경남도 안변군 설봉산에 있는 절

[강원도(북한)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절]

일제강점기에 31본산 중의 하나였다. 절 이름이 의미하듯 이 절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전 무학대사(無學大師)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서산대사의 〈설봉산석왕사기 雪峯山釋王寺記〉에 의하면, 무학은 꿈을 해몽한 뒤 응진전을 짓고 곧 오백성재(五百聖齋)를 설했으며 천진당(天眞堂)·진헐당(眞歇堂)·인지료(仁智寮)·용비루(龍飛樓) 등을 지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왕이 된 뒤 큰 절이 되었으며 1401년(태종 1)에는 태조가 16일을 머물면서 직접 동구(洞口)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는데 그뒤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고 좋은 배는 진상했다고 한다. 같은 해 5월에 절의 동쪽에 이성계의 명으로 태종이 별궁을 짓도록 했다. 이밖에 〈지봉유설 芝峯類說〉·〈약천집 藥泉集〉에서도 이성계가 석왕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능화(李能和)는 단지 숭불호법을 부회한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로는 1377년(우왕 3)에 이성계가 동북면도원수(東北面都元帥)로 있으면서 유원(柳源)·정몽주(鄭夢周)·이화(李和) 등이 청주(淸州:지금의 북청군)에 갔을 때 해양(海陽:지금의 길주군) 광적사(廣積寺)가 병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대장경과 불상·법기(法器) 등이 있다는 말을 듣고 김남운(金南運)을 보내어 이것들을 배에 실어오게 하고 보완한 뒤 석왕사에 안치하여 오랫동안 임금을 축수하고 나라의 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성계가 이 절의 창건과 관련이 매우 깊음을 알 수 있으며, 1377년에 이미 석왕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377년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 때는 모든 절의 재산이 몰수당했으나 태조의 원당(願堂)이었던 귀주사와 석왕사만은 제외되었다. 석왕사에는 여말선초의 건물로 알려진 응진전과 호지문(護持門)이 있으며 1732년(영조 7)에 개수한 대웅전·영월루(映月樓)·흥복루(興福樓)·범종루(梵鐘樓)·용비루(龍飛樓)·조계문(曹溪門) 등이 있고, 31본산시대에는 여러 전각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를 관장했다.

석왕사(釋王寺)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봉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함경남도 안변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946년 안변이 강원도로 편입되고 고산군이 안변군에서 분리되는 등 행정구역 변동이 일어나면서, 강원도 고산군 고산리에 속하게 되었다.

석왕사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성계가 젊었을 때 안변을 지나다가 석왕사 인근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꿈 속에서 이성계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졌고,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뒤 한 고승에게 해몽을 부탁하니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진 모습은 임금 왕(王) 글자를 상징한다며,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고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나므로 왕이 될 징조라고 풀어 주었다. 해몽을 해준 이 승려는 지금의 석왕사 자리의 토굴에서 수도하고 있던 무학이라고 전한다. 이성계는 왕이 된 뒤 무학과 만난 장소에 절을 짓고 임금이 될 꿈을 꾼 곳이라 하여 석왕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조선의 시조와 관계가 깊은 절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건물 수십 동이 세워지는 등 번성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31본산의 하나로 인근 귀주사와 함께 함경남도 지역의 본산 역할을 했다. 한국 전쟁 때 주요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어 불이문(不二門) 등 일부만 남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2008년에는 복원 계획도 발표되었다

[사진은 순천 송광사의 구시]

이거 북쪽(석왕사 쪽)에는 특급 비밀인데....

관련자료

댓글 7

김성배님의 댓글

이 스님들이 우리동네에 와서리 공갈 대회를 ...속리산 복천암 화장실 높이는 5미터 이상인것은 확실 했엇지만... 고맙습니다.

kmryel님의 댓글

이곳에 오니 어렸을적 방앗간 옆 뒷간이 떠오르네.......
어느대학 전문강사에게서 똥에대한 강의를 들은적 있는데
자기아버지가 변을 잘못보는 병이있어서
항상 아버지한테 하는인사가 * 변 보셨습니까 ? 였어요. 냄새가 나는것 같지요 ?
그런데 그냄새는 결코 나쁜냄새가 아니랍니다.땅에서 보면 자연 분해가되어
거름이되고 옛날 뒷간에있던
것은 논밭에 뿌려 곡식을 여물게 만드는 아주좋은 밑거름이 되었으니 .......
향기로 생각해도 무방할듯 싶네요.

이순희님의 댓글

뻥치기 대장들 이군요.
자기몸이 엣날에 컸었다고 뻥을치던 두사람 비슷하네요,
한사람이 (나는 엤날에 머리는 하늘닿고 발은 땅에 닿았었다오,)
하니 한사람은 (그때 머리위에 걸리는게 있었쟌소 그게 내 거시기였소)
했다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parksinja님의 댓글

저희 절의 뒷간도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만 하지요.
한 사나흘 전 주지스님께서 큰 일을 보셨는데,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ㅎㅎㅎㅎㅎ.........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