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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의사가 촬영한 ''1954년 대구 생생한 삶 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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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텍사스주에 거주하고 있는 애덤은 79세의 적지않은

나이에도 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한창이었던

1954년부터 1955년
까지 대구에서 2년간 교회 봉사활동을

자원해서 한국에 왔었다고 한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그가 미국에서 갓

의과대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그는 한국에 대해
서 "당시 한국인들이 모두 검은 머리를 하고,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고 회
고했다. 또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지게가

무거운 짐을 들어도 힘들지 않게 설계된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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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알리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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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김민정님의 댓글

어무이가 그립습니다.
우리의 어무이가 살았던
모습일거 같아요.

설날을 앞에 두고
모락 모락 김나는
떡국거리 뽑아 머리에 이고

해 질녘까지 긴 줄 늘어 서서
언 손 녹여가며 기다리다
쌀 강정 만들어 돌아 오시던 어무이..

제가 살았던 시절보다
몇해 이전 사진 같습니다.
음악과 사진이 어무이 생각나게 합니다.

~~~어무이는 어머니의 경상도 사투리~~~




고종우님의 댓글

비중있는 역사의 장 을 펼쳐 놓으셨네요.
다시 한번 시공을 초월 하는 홈의 위력에 희열을 느끼고
그 홈속에서 함께 출렁 임을 스릴있어 합니다.
저는 그 이후 출생자라고 핑계할까요?

이인규님의 댓글

전란중의 출산률은 평상시에 비해 월등하다는 어떤 학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족보존의 본능은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더욱 강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 사진을 보면서 실감을 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그렇게 많이 희생되던 때 어느 사이에 애기들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 내 놓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판기님의 댓글

어디서 이런 귀한 자료를 찾아 올리시는지 감사할 뿐입니다
한국전쟁 직후니 삶이 고달픈 때이고
특히 달성 예배당이 진정한 교회 모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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