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9. 箕子朝鮮에 대한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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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9. 箕子朝鮮에 대한 다른 이야기
箕子朝鮮에 대한 다른 이야기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기자가 세웠다는 나라로, '기자를 조선 땅에 봉(封)하였다'는 중국의 기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 존재 여부나 성격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사학계는 일반적으로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명칭은 조선 땅에서 기자가 세운 나라이므로 '기자조선'으로 부른다. 조선 시대에는 後朝鮮으로 부르기도 했다.
1. 개요
고조선과 관련된 기자 조선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은 기원전 12세기말경의 인물로 추측되는 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으로, 《상서》·《논어》·《관자》 등 중국 선진 시대 문헌에는 인물로서의 기자와 나라로서의 조선이 별도로 등장하였으나 기자 조선은 언급되지 않았다. 진, 한대 이후에 양쪽이 관련된 기자 동래설이 등장하였고, 이 내용들이 《삼국유사》를 비롯한 한국의 문헌에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문헌의 기록을 근거로 단군조선에 이어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약 1천 년 간 기자(箕子)와 그 후손이 만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는 내용을 받아들였으며, 조선 후기 이후로는 기자의 동래와 관련된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기자조선의 허구성을 주장하여 그 존재를 부정하였고, 현재 대한민국 학계에까지 이러한 경향이 이어졌다. 북한 학계에서도 "대국주의 사상에 입각한 중국인들에 의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기자 조선을 고조선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사회 내부에서 새로이 등장한 지배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동이족의 이동 과정에서 기자로 상징되는 어떤 부족이 중국의 은, 주 교체기에 중국 화베이에서 대릉하, 남만주를 거쳐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치 세력을 잡은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주장되고 있으며, 이들 세력과 고조선, 한나라 등 주변세력과의 관계와 영향, 위치와 영역, 성격 등에 대하여도 여러 의견이 있다.
2. 문헌의 기록
기자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상서대전(尙書大傳)》〈은전(殷傳)〉,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지리지(地理志)〉, 《위략》《삼국지》《위서》〈동이열전〉, 《삼국지》《위서》〈동이전〉 등의 사서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문헌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 내용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기자는 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로, 상나라 왕의 후손이다. 일반적으로 원래의 이름 대신 '기자(箕子)'로 불린다.
•기자는 상나라 걸왕의 태사(太史)로, 왕의 정치에 대해 간하다가 옥에 갇히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여 5천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의 영토로 망명하였다.
•그 후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기자는 끝내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기자는 후일 주 무왕을 찾아 홍범구주를 설명하였다.
3. 시대에 따른 관점
각 시대에 따른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1)고려시대
고려 시대에 들어 기자에 대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소개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전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의식이 체계화되었다.
2)조선시대
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은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서 인식하였다. 단군과 더불어 기자에 매년 제를 지냈으며,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 세조 때에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는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러 학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저술하였고, 만주 중심의 사관을 가졌던 안정복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출간된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를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후로 등장한 사림파의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중국의 하.은.주 3대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와 연관된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의 두 주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한국의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여, 조선 초기의 체계를 따랐다. 대한제국 이후의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4. 기자의 행적에 대한 논란
조선시대의 논란은 주로 사서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것이었다. 주의 무왕을 피해 조선에 자리 잡은 기자는 주나라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장유, 홍직필 등)
-일제 강점기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의 내용을 근거로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되었다. 기자조선의 존재 부정하거나 한민족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시라토리, 이마니시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일본의 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중국에서 기원했으므로 중국인이 세운 나라로 조선과는 관계없음을 주장하였다.
-광복 이후
광복 이후로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에 기자조선과 관련하여 '한씨조선(韓氏朝鮮)'을 교과서에서 언급하기도 하였으나 삭제되었으며,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의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
5. 기자조선에 대한 현재의 관점
현재 제시되어 있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부정론>
기자가 고조선에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이야기는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주장이다. 주장 및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유적의 부재
1102년(숙종 7년)에 고려의 왕이 평양에서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기자묘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1950년대 북한 학자들이 발굴한 결과 '벽돌조각, 사기조각' 밖에 나온것이 없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익산에 있는 기자조선의 후손 무강왕의 무덤은 발굴 결과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김정배는 무문토기, 석관묘, 지석묘 등의 유물에서 중국 문화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
황하 문명의 청동기와 요서 동쪽의 청동기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청동검과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검은 큰 차이가 있다. 중국식동검은 손잡이와 칼날이 일체형으로 제작되어 있지만,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은 칼날과 손잡이 그리고 장식부분 등 3가지로 구성된다. 특히 주석 함유량이 중국식 동검에 비하여 월등히 높다. 따라서, 기자조선의 유물로 여겨지는 비파형 동검의 청동 제작 기법이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고조선에 예의와 문화를 전했다고 하는데, 기자조선의 영토로 추정되는 요서 이동의 영역에서 은나라에서 출토된 갑골문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요서 지방에는 고조선의 세력권임을 의미하는 고인돌이 존재하지 않는다.
② 문헌상의 문제점
한나라 시기 이후의 사서에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나타나지만 서기전 3세기 이전의 사서(논어, 죽서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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