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13. 洪景來(홍경래)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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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13. 洪景來(홍경래)의 난
1811년(순조 11)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약 5개월에 걸쳐 평안도지역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봉기. 평안도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1862년(철종 13)의 임술농민항쟁,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과 함께 19세기에 일어난 대표적 농민항쟁이다.
1. 사회적 배경 :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통해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색인 : 조선).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농민 1인당 경작능력이 4, 5배나 늘어남에 따라 농토에서 불필요해진 다수의 무전농민(無田農民)들은 유민화(流民化)되었다. 유민들은 도시나 광산 등지로 가서 상업에 종사하거나 광산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많은 수가 농토에 그대로 남아 고용노동자가 되는 등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에 반해 고용노동자를 고용해서 농지경영을 직접 관리·감독하여 부를 축적하는 경영 형 부농이 생겨났다. 또한 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됨에 따라 사상(私商)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으며, 그들 중에는 대청(對淸)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한 만상(灣商)·송상(松商) 등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특권상인층의 존재로 인해 상업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 불만이 많았다. 또한 상업이나 농업을 통해 부를 획득한 계층들은 대부분 경제력을 행사하여 농촌사회의 말단행정력을 장악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중앙정치권까지 진출하고자 했다. 또한 관료가 되지 못한 몰락양반층의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조되는 한편, 신분제가 점차 붕괴되어 하층민들 사이에는 평등의식이 성장했으며, 〈정감록 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보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부에서는 세도정권으로 인해 정치기강이 극도로 문란했으며, 특히 인사행정의 문란으로 지배계층의 농민층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평안도 일대에서는 사회변혁을 위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2. 발생과 경과 : 몰락양반인 홍경래는 토호인 우군칙(禹君則)·김창시(金昌始)와 대규모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희저(李禧箸) 등을 농민군 최고지휘부로 삼고, 가산군(嘉山郡) 다복동(多福洞)에 근거를 두면서 농민전쟁을 준비했다. 홍경래는 이들 세 사람과 함께 우선 평안도민의 정치참여배제 등 지역차별정책에 불만이 많은 몰락양반·상인·토호·이속 등을 농민군의 지도부로 포섭했다. 그리고 평안도의 주요도시에 지방조직을 결성했으며, 운산(雲山) 촉대봉(燭臺峰)의 광산노동자와 빈민·유민 등을 고용하여 하층군사로 삼아 훈련시켰다. 또한 농민전쟁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중앙정치권에 진출하고자 하는 부유층도 있었다. 그밖에도 한성(漢城)의 중인·서얼층 및 압록강 너머 망반인(亡叛人) 등과도 연계를 맺고 거사를 모의하는 등 모든 반정부세력을 규합하고자 했다.
당초에는 거사일을 12월 20일로 잡았는데, 거사계획이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에게 발각되자 18일로 앞당겼다. 거병 당시 다복동에 모인 병력은 1,000명이었으며, 군대는 남·북 두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남진군은 평서대원수 홍경래가 총지휘하고, 모사(謀士)에 우군칙이, 선봉장에는 홍총각(洪總角)이 임명되었다. 북진군은 부원수 김사용(金士用)의 인솔하에 의주로 진군했는데, 모사에 김창시, 선봉장에 이제초(李濟初)가 임명되었다. 이희저는 도총(都總)이 되어 남·북진군의 군량과 군수 등을 총체적으로 관할했다. 남·북으로 나누어진 반란군은 12월 18일 투쟁을 전개한 후 10일도 채 되지 않아 가산·곽산·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 청천강 이북지역을 거의 장악했는데, 이는 점령지역마다 향임·무임·이속 등 각 지방세력들이 내응했기 때문이다. 12월 20일 남진군은 박천을 점령한 후 영변과 안주의 공략순서를 놓고 대립하다가 홍경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홍경래의 요양과 전열수습을 위해 다복동으로 회군함으로써 4일간 진공을 늦추었다.
이때 관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영변에서 반란군의 내응세력을 체포할 수 있었다. 남진군은 영변공략이 어려워짐에 따라 안주를 공격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이어 29일에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남진군은 관군에게 대패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했으며, 북진군도 이듬해 1월 10일 곽산 사송야전투에서 관군에서 크게 패배한 것을 계기로 계속 패배하여, 같은 달 17일경에는 정주성을 제외한 반란군의 거점은 한 곳도 남지 않았다. 그후 정주성에서 식량난과 군수품의 부족 등을 견디면서 4개월이나 농성했지만, 4월 19일 관군이 성 밑으로 굴을 파고 폭약을 폭발시켜 성벽을 무너뜨린 후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5개월에 걸친 난은 진압되고 말았다. 이때 사로 잡힌 수는 2,983명이었는데, 23일에 모두 효수되었다. 주모자 우군칙·이희저는 난군에 섞여 도주하고,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홍총각·김이대·운언섭·양시위 등은 사로잡혔다.
♣ 곽산. 정주. 안주 낯익은 이름이다.
3. 성격과 실패원인 : 1811년 12월 22일에 선포된 반란군의 격문을 보면, 지방적 차별대우를 반대하는 평안도 몰락양반·토호들의 요구가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다. 또한 안동김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민의 생활에 끼친 폐단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조선왕조 멸망의 불가피성과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격문에는 농민들의 절실한 문제인 토지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신분제도를 반대하는 사상도 철저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적극 유도하거나 농민전쟁에 가담한 농민층의 투쟁열기를 북돋아주지 못했는데, 이는 반란군이 쉽게 무너진 가장 큰 이유이다. 그외에도 반란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토호와 상인들이 반란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곧 배반한 사실과, 반란군이 속전속결을 못하고 중간에 4일이나 지체하여 관군으로 하여금 전열을 정비하게 하는 등의 전략상 오류를 범한 것이 난이 실패하게 된 원인이었다. 이와 같이 홍경래의 난은 실패했지만 세도정권의 부패와 무능성을 폭로했으며, 일반민들에게 조세거부나 무력항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함으로써 조선 중세사회의 해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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