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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12. 李适(이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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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時代最高權力 追求慾展開樣相-12. 李适(이괄)의 난

1624(인조 2) 이괄이 일으킨 반란.

임진왜란 때 붕당간의 본격적인 쟁권(爭權)은 가장 주전론적 입장에 섰던 북인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들은 다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이후 광해군대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북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서인계열의 사림세력들은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대북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1623(광해군 15) 서인계의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私募軍)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그런데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金瑬)가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은 이를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功西派)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非西人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22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자산(慈山)-상원(祥原)-평산(平山)-개성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과 남이흥(南以興)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平山)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馬灘예성강 상류)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 이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고, 211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都民)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鞍峴]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水口門지금의 광희문)을 나와 광주(廣州)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 한명련이 215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유명세를 탄 서울 양재역 일대의 말죽거리는 현재 서울 서초구 양재역 사거리 일대를 가리킨다. 이 일대는 서울 도성을 나와 삼남으로 출발하는 지점에 위치해 서울 도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죽거리가 마지막 주막이었기에 많은 여행자들이 이 일대에서 여장을 풀고 먼 길을 걸어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다는 데서 유래했다. 1624이괄의 난때 인조 임금 일행이 남도지방으로 피난하면서 허기와 갈증에 지쳐 이 일대에서 급히 쑤어온 팥죽을 말 위에서 마시고 부랴부랴 과천으로 떠났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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