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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草報恩의 典範, 譯官 홍순언과 석성(명나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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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結草報恩典範, 譯官 홍순언과 석성(명나라)의 이야기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가 역사이다. 낯선 이름의 홍순언. 그는 조선의 운명을 달라지게 한 역관이다. 임진왜란 하면 유성용,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익숙하지만, 실제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장수도 무사도 아닌 중인 출신의 역관 홍순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의 역사를 바로 잡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 일이 가능하게 된 계기가 참 재미있다.

<통문관지>는 조선시대 중국과 일본 등과의 외교통상의 관계를 수록한 책이다. 조선 외교의 기본 방침이었던 사대교린과 관련된 외교사례와 더불어 일선에서 활약했던 역관들의 행적이 기록되어져 있다. 그 중에 홍순언의 일화가 소개되어있다.

 

16세기 조선 선조시대에 중국 역관이었던 홍순언. 북경에 도착하기 하루전날 그는 통주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다. 그리고 한 기생집에 들르게 되고 그것이 그와 조선에게 역사에 기록될 운명적인 만남이 된다. 상복을 입고 나타난 기생에게 연유를 묻게 되는 홍순언. 그 기생은 본래 잘사는 집안 규수인데, 부모가 역병에 걸려 죽임을 당해 관이 객사에 있어 외동딸인 자기가 관을 고향으로 모셔가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 기생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 말에 홍순언은 300금이라는 큰돈을 준다. 그의 전대를 모두 털어서 말이다. 은혜를 입은 기생은 홍순언의 이름을 묻지만, 홍순언은 ""이라는 성씨만 알려준 채 그대로 나왔다. 곤경에 처한 여인을 구해준 의로운 남자.

 

홍순언에 대한 기록은 30여권이 넘는다. 역사서뿐만 아니라 소설집도 상당했다.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었다. 그런데, 통문관지(=역사서)에는 역관인 홍순언의 얘기를 왜 이렇게 자세하게 적어놨을까?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태조 3(13944)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태조 이성계가 믿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에서 조선왕실의 가계에 대해 잘못 기록한 사건이었다. 600여년전 조선조정을 뒤흔들었던 문제의 발단은 대명회전 정덕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명회전은 명나라의 법전으로 당대의 법령과 제도를 집대성해 놓은 책이다.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엉뚱한 사람(이인임)으로 잘못 기록 되어져 있다. 이인임은 고려말 이성계와 권력을 다투던 정적이었다. 조선은 정통성을 중요시 했기에 이성계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람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당시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내용을 올바로 고치려고 했다.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이라고 자신의 가계를 설명하고 또 이인임의 가계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기 위해 명나라로 사신을 보냈다. 조선은 그 후 2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지만, 대명회전의 기록은 고쳐지지 않았다.

 

명나라에서는 분명한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계속 매달리는 외교현황을 보면서 정치적인 협상 히든카드로 쓰기위해 조선의 청을 계속해서 거절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00여년 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종계변무( 종계변무 : 잘못 기록된 왕실의 가계를 시정하기 위해 명나라에 주청한 일) 이번에 홍순언이 이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행길은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맡은 임무를 완결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희생양이 됨) 홍순언은 이미 10년전 종계변무로 북경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여러 이유를 대며 조선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계변무를 해결하기 위해 북경으로 들어서는 입구 조양문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반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종계변무사인 홍순언의 일행을 반기는 자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애타게 찾는 이가 있었으니. 홍순언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은 명나라의 예부시랑(외무부차관) 석성이었다. 외무부차관이 조선 역관을 맞이하러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전례에 없는 아주 파격적인 접대였다. 예부시랑이 조양문까지 나온 것도 당황스러운 일인데, 그 부인은 홍순언에게 절까지 올렸다. 예부시랑의 아내는 통주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던 것이다.

 

홍순언은 까마득히 잊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홍순언 덕에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몸까지 지키게 된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석성 예부시랑은 홍순언이 북경에 온 이유를 듣게 되고 여러 방면으로 종계변무의 일을 도와주려한다. 하지만, 소식은 더디기만 했다. 그렇게 북경에서 두 달간 머무르게 되었고 드디어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대명회전은 조선의 요구대로 바뀌었다. 수정본인 대명회전 만력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잘못 기록된 정덕본과 수정된 만력본. 홍순언이 200여년의 조선의 숙원을 해결하고 압록강에 있을 때 석성의 부인이 "보은(報恩)"이란 수를 새겨놓은 직접 짠 비단 100필을 홍순언에게 선물로 주었다. 사실 조정은 역관 홍순언에게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홍순언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광경지격록>을 보면 당시 선조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 수 있다. 외교적인 자신감과 백성들에게 왕실의 떳떳함을 보일 수 있었기에 큰 의미가 있었고 경사였다. 홍순언은 이 일로 나라를 빛낸 공신이 된다. 선조는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신료들에게 광국공신의 칭호를 내리는데 19명의 광국공신 중 역관은 홍순언 단 한 명이다. 그리고 곧 우림위장으로 임명한다. 우림위장이란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 사령관으로 종2품에 해당된다. 이는 역관으론 오를 수 없는 관직이었다. 또 선조는 당릉군이라는 군호를 하사하게 된다. 군호를 받게 된다는 것은 왕실과 핏줄이 같다는 뜻으로 신하로써는 최고의 명예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선조는 홍순언에게 땅과 노비도 하사했다. 그때 받았던 땅이 지금의 을지로 입구이다. 조선시대 때에는 보은단동, 보은골로 불려졌다. (홍순언이 명나라에서 받아온 보은이란 글씨가 새겨진 100필의 비단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 보은단동이란 이름으로 조선은 홍순언을 기억했다.

 

역관들은 그 시절 실력을 가장 철저하게 검증 받았던 전문가들이였다. 그렇다면 유학도 떠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역관들은 어떻게 외국어를 공부했을까?

노걸대. 조선 역관들이 중국어를 공부했던 중국어 초급 회화책이다. 노걸대는 중국으로 장사를 하러가면서 겪게 되는 100여개의 상황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오고가는 대화로 구성되어져 있다. 홍순언도 이 책으로 중국어를 공부했던 것이다. 노걸대의 주인공이 상인들인 만큼 대화의 대부분이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하는 내용들이다. 헌데, 왜 이렇게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하는 내용이 담긴 노걸대를 역관들은 회화책으로 사용했을까? 당시 역관의 임무에는 사신의 말을 통역하는 것 외에 국제무역이 포함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홍순언도 당연히 무역에 관여했다. 앞에서 봤던 여인에게 주었던 300금이라는 돈을 기억하는지? 그 돈은 지금으로 따지면 억대의 돈에 해당된다. 억대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통주에서 여인에게 줬던 돈은 관아에서 빌린 무역자금이었다. 하지만 조선으로 돌아와 돈을 갚지 못한 홍순언은 공금횡령으로 옥에 갇힌 신세가 된다. 죽을 때까지 옥에 갇혀 지내게 된 신세에 놓인 홍순언. 종계변무를 이루지 못하고 오면 목이 떨어질 거라는 왕의 명령에 다른 역관들이 돈을 모아 홍순언의 빚을 갚아주고, 그 대신 홍순언을 죽음의 길(종계변무)로 내몰게 된 것이다.

 

조선전기 역관은 관아에서 빌린 자금 외에도 인삼을 기본 무역자금으로 이용했다. 역관에게는 출장비가 지급되지 않았는데 그 대신 인삼을 판돈으로 경비를 충당하도록 했다. 한 번에 가져갈 수 있는 양은 인삼 10근이었다. 쌀로 따지자면 150가마에 해당하는 돈이다. 현재로는 2천만 원이 넘는 돈이다. 국제무역은 역관들의 주업무 이기도 했다. 결국 역관들은 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져가는 인삼과 각종 관청에서 빌려주는 공금을 합해서 상당한 양을 무역자금을 만질 수 있었다.

 

역관은 이 국제 무역을 통하여 조선시대 최고 갑부가 되기도 했다. 홍순언을 비롯한 역관들은 국제무역상이면서 전문 외교관이었다. 모든 외교실무는 역관이 맡아해야 했다. 통역이나 외교문서를 작성해야하는 전무적인 일은 역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양반들은 역관들의 일들을 가볍게 생각했고, 역관은 같이 설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역관에 대한 차별은 사소한 것에서 부터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 백패는 문과 응시생들이 예비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에 합격할 때 받는 문서다. 그러나 역과 합격자는 급제를 할지라도 백패를 받아야했다. 조선초기에는 모든 합격자가 홍패를 받았지만 역관을 천시하면서 문과 합격자와 구별하기 위해 백패를 지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는 지역까지도 구분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촌으로 고급관료들이 살았고, 남쪽은 남촌으로 선비들이 살았다. 그 중간인 청계천 근처를 중촌이라 불렀다. 이 중촌에는 전문기술 관료들이나 역관, 의원들이 살았기 때문에 조선후기부터 이곳에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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