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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그 리더십2. 등극과정과 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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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과 그 리더십2. 등극과정과 양녕대군

양녕도 絶對性 문제에 걸려 낙마했다

1. 양녕대군

이름은 제(), 자는 후백(厚伯). 어머니는 민제(閔霽)의 딸이며, 부인은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1402(태종 2) 원자(元子)로 봉해졌으며,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9년 이후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나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학문에 게으르고 무절제하다고 하여 태종에게 지적을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서 방종이 더욱 심해져, 태학(怠學정강(停講)이 계속되었다. 또한 매와 개 등 완물(玩物)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군소배들과 어울려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 1417년에는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봄으로써 더 큰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도록 권하고 벌을 주기도 했지만 끝내 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결국 14185월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어 동생인 충녕대군(忠寧大君 : 뒤의 世宗)에게 왕세자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 후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으며, 세종과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배려로 무사했다. 시와 글씨에 매우 뛰어났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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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했으며,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그 본심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2. 폐세자 사건의 전말

양녕대군은 태종 이방원을 닮아 다혈질적이고 호방한 성격이었다.

이방원이 두 번째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에 국왕이 되자 장남이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양녕대군은 세자가 되었으나 제왕학을 익혀 통치술이나 국가 경영을 배우는 것보다 활을 쏘고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소위 유흥에 빠져 제왕의 도를 학습하지 않았다. 세자는 단순한 왕자가 아니라 왕위 계승권자이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세자가 학문을 등한시하고 유흥에 몰두하자 태종은 근심했다. 여러 차례 경고를 했으나 기어이 "어리"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어리는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으로 한양 장안에서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양녕대군도 어리가 조선 제일의 미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녀가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장안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시골에서 돌아와 가마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어리를 발견했다. 양녕대군은 어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었다.

 

어리의 아름다움을 들은 적이 오래였으나, 그녀가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그 뒤 한양에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나오라고 했으나, 그 집에서 숨기고 내보내지 않으므로 내가 강요했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했으나 한 번 보았어도 미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같이 모여 구경하였다. 그날 밤에 광통교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자고, 이튿날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으로 들어왔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양녕대군이 자신의 동생인 충녕대군, 뒷날의 세종에게 고백한 부분이다.

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양녕대군이 이렇게 고백을 했을까. 어찌되었거나 양녕대군은 곽선의 첩 어리를 강제로 끌고 가서 광통교 근처의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에 대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양녕대군의 어리에 대한 사랑은 무섭게 타올랐다. 대궐에 데려다놓고 매일같이 정을 통하니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어리는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은밀하게 고해바쳤다.

태종은 대로하여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인 뒤에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 이내가 양녕대군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비록 왕세자가 잘못은 있어도 폐위하면 안 된다고 눈물을 흘렸다.

실록에는 눈물이 턱으로 흘러내려 말씨가 간절하니 민여익과 변계량을 비롯,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자는 반성하고 어리는 대궐에서 추방하라.”

태종은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녕대군에게 엄중하게 경고하고 어리는 대궐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겉으로는 반성하는 체했으나 여전히 어리를 잊지 못해 몰래 만났다.

 

양녕대군 은 풍류를 좋아하고 방탕하기만 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양녕대군은 필체가 뛰어나 몇 년 전 불에 탄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손수 쓰기도 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필적을 보면 당대의 어떤 인물들 못지않게 필법이 뛰어났다.

 

산허리 도는 안개 아침 짓는 연기인가

넝쿨 사이 걸린 달은 밤을 밝히는 등불이네.

나 홀로 고적한 암자에서 자고 나니

탑 하나 저만치 홀로 서 있네.

그가 63세에 묘향산을 구경하며 지은 <題香山僧軸>이라는 작품이다.

 

양녕대군 폐세자 문제는 태종의 본처인 원경왕후에게서 낳은 네 아들 중 양녕과 충녕 대군이 치열하게 왕세자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열되었다.

양녕대군이 어리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자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

 

태종은 자신의 큰아들인 왕세자 양녕대군을 내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뇌했다.

양녕대군이 개성에 와서 알현을 청해도 만나주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실망하여 대궐에서 나오다가 충녕과 마주쳤다.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양녕대군은 동생 충녕대군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말로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이 치열하게 왕세자 자리를 다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양녕대군이 질책을 했으나 충녕대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하의 시녀는 다 중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신의 여러 첩(:어리와 숙빈)을 대궐에서 내보내니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고 있습니다. ()나라 고조(高祖)가 산동(山東)에 거()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이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나중에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글을 올려 아버지는 첩을 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자신의 첩은 쫓아내느냐고 항의했다. 게다가 한 고조의 예까지 들면서 훗날 자신도 성군이 될 수 있다고 강변했다.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격렬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를 본 태종은 대로했다.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니 망령된 일이다.”

태종은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충녕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내린 교지다. 어리 사건이 아니라면 세종은 결코 조선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한글도 창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충녕대군 세종은 어리 사건을 이용하여 조선의 국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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