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대 여류 시인, 허난설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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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대 여류 시인, 허난설 헌
(허난설헌의 묘지)
본명은 허초희, 난설헌(蘭雪軒)은 호, 자는 경번(景樊)이다.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 호: 초당(草堂))이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이다. 8세에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시인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고, 15세 무렵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규원과 친정이 역옥에 연루되는 겹친 화액에서 오는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로 여성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인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27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시 약 213수 가운데 128수는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심정을 읊은 신선시(神仙詩)이며, 애상적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작품의 일부는 균이 명(明)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으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1711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 앓이 만을 하다가 젊디 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회 타파와 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한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조차 없었던 사회 속에서의 한을 시에 담아 한탄하며 표출하기도 하였다.
閨怨(규원)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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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미쳐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반면 김성립은 늘 재주가 빼어난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늘상 허균의 눈에도 그리 보여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은 우수한 자"라고 매형을 평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 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난설헌에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한 해 차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는 일찌기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27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서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 전해진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한 집의 며느리로서 대우 받으며 자식들을 그리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였으나, 아이를 얻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본처가 아닌, 후처와 합장하였다고 한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 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듯 한다. 당대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네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 여비, 여필종부 등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이라할 것이다...
<哭子(곡자) >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봄 비>
春雨暗西池 춘우암서지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輕寒襲羅幕 경한습라막 찬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
愁倚小屛風 수의소병풍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墻頭杏花落 장두행화락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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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허난설헌의 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녀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婦德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곧게 그녀가 창작한 詩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점에 있다.
허난설헌은 왜곡된 형태이기는하지만 제한적으로 사회활동이 자유로워 문재(文才)를 뽐내는 것이 가능하던 황진이와 같은 기생도 아니었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 같은 훌륭한 자식을 길러낸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상징하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詩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詩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지식인 문인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송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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