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천도, 무학과 삼봉 정도전의 예언과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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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하고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궁궐을 어느 방향을 안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었다.
이는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느냐 아니면 인왕산을 주산을 하느냐와 연결된다.
여기서 유명한 삼봉 정도전과 무학 대사 간의 이야기가 있다.
궁궐을 남향으로 안치느냐 아니면 동향으로 안치느냐를 문제를 놓고 견해가 서로 달랐다고 한다.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백악산, 인왕산, 남산(목멱산), 낙산 등 네 개이다. 백악산(북악산)은 북산으로 청와대 뒷산으로 종각에서 보면 반듯하게 바로 서 있지 못하다.
그 산에 흰바위가 해골로 보여서 불길하다고 한다.
인왕산은 서산으로 바위산으로 험하고 강하다. 남산인 목멱산은 온순한 산이다.
그런데 낙산은 그 산세가 다른 산에 비하여 아주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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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북악산)
궁궐을 남향으로 할 경우 지금과 같이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남주작: 남산, 북현무: 백악산이 된다. 이럴 경우 좌청룡은 너무 약하고 우백호는 너무 강하며 남주작은 비켜 있고 북현무는 비틀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향으로 지을 경우 인왕산은 북현무, 백악산은 좌청룡, 우백호는 남산, 낙산은 남주작이 된다. 풍수지리설의 좌표가 달라진다.
그리고 한강이 서로 흐르는데 비하여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물길이 역방향이 된다. 특히 남향인 경우 물길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나가는 형국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정도전은 고려의 패망원인을 불교에서 찾아 주자학적 입장에서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관철시켰다. 종묘사직(宗廟社稷)과 궁궐을 지은 다음에 손수 정전 이름을 지어 헌액 하였으며 4대문으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대문 이름(興仁門, 敦義門, 崇禮門, 弘智門)에 삽입하였고 그 중심에 보신각(普信閣)을 세웠으나, 선바위는 성(城)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궁궐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학은 조선은 장자 계승이 어렵게 된다고 예견하였다. 조선의 27왕 중에 장자 계승은 7왕에 불과하다.
도성의 석곽을 쌓을 때 삼봉과 무학과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인왕산 남쪽에 선(禪)바위가 있는데 그것을 성 안에 넣느냐 안 넣느냐에 대하여 견해가 달랐다. 선바위는 인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거대한 바위로, 정말 신령스럽고 영물스럽게 생겼다. 마치 좌선을 하고 있는 스님과 같다고 하여 선바위라고 한다. 그 앞에 가면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뒤로 가면 인왕산을 보고 큰 입을 벌려 고함치는 두 형상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무학대사와 닮았다고도 한다.
禪바위
무학은 성 안으로 축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억불숭유에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성 바깥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무학이 200년 후에 큰 환난을 피할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특히 선바위는 암석숭배(岩石崇拜)의 대상으로 불교와 무속신앙(巫俗信仰)이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중요 성지가 되었다.
치마바위에 얽힌 애타는 설화도 있다. 조선 중종의 단경왕후의 이야기이다.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비, 신씨의 질녀이다. 그녀는 열 두살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 세력에 의해서 왕으로 옹립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 신수근이라 반정군의 제거 대상 1순위였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폐위시킬 것을 강력히 주청한다. 결국 중종도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고 만다.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다르게 애틋했던 모양이다.
중종은 신씨가 보고 싶으면 경복궁 경회루에 올라 그녀의 본가가 있는 인왕산 어름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신씨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아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었던 분홍색 치마를 내어, 경복궁이 마주 보이는 인왕산 자락 널찍한 바위에 펼쳐 놓았다 한다.
그러나, 서로 떨어져 지나면서 절절한 마음을 산자락에 치마로 펼쳐 놓은 채, 폐위된 이후에는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신씨는 외롭게 한 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 후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으니,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양주군 장흥면 일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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