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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가 본 국제축복가정-용구혜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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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세계일보 문화부기자가 국제축복을 받고 진도에 살고 있는 한 일본여성의 생활을 통해 느낀 감동을 소개하기 위해서 보내온 글입니다.[편집자주]

조금만 힘들어도 이혼을 하고 아이들을 버리는 요즘, 장애인 남편을 만나 가정을 잘 꾸리고 19년을 살고 있는 한 일본여성이 있습니다. 일본 이릉은 다키구치 게이코(龍口惠子), 한 명 용구혜자. 가난으로 힘들게 사는데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반신불수 남편을 지금까지 헌신적 으로 보살피며 살고 있는 귀화한 일본여성입니다.

용구씨와 인터뷰를 2차례 하면서 저는 용구씨의 헌신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았고, 일본계 한국인이 가난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식구'는 아닙니다. 세계일보에 9년째 다니면서 어렴풋이 교리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용구씨를 만난 뒤 "장애인 남편과 축복가정을 이뤄 이역 땅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용구씨에게 뭔가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키구치씨를 소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식구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진도군청에서 관광홍보일을 하고있는 다카구치 게이코씨 #첫번째 만남

내가 용구혜자씨를 처음 만난 때는 지난 4월 중순. 진도군청이 관광 활성화를 위해 한겨레와 국민일보, 세계일보 레저담당 기자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다. 횟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억양이 우리와 약간 다른 한 여자가 들어왔다. 방에 들어오면서 용구씨는 국민일보 박모 기자와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구면인 듯 했다.

박 기자는 지난해 진도를 방문했을 때 진도군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는 용구씨를 만났고, 진도사람보다 더 진도를 맛깔스럽게 설명하는데 반했다고 나에게 소개해 줬다. 다키구치씨는 지난해 한국관광공사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활동하는 수백 명의 문화관광해설사 중에서 선정하는 '아름다운 관광 한국을 만드는 사람 10인'에 뽑히기도 했다.

용구씨는 얼굴에 주름 하나 없고 밝아 앳되어 보였다. 얘기를 하는데도 시름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군청 직원이 말하는 용구씨의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서 왔는디 반신불수인 남편과 살어. 하도 딱혀 군청서 취직시켜 줬는디, 빚 때문에 쥐꼬리만한 월급이 압류를 당혀 50%뿐이 못 받는다지"라고 말했다. 그는 "열녀여, 열녀. 요즘 우리나라 사람도 남편이 사고로 불구가 되면 도망가는 판인데, 19년 넘도록 불구 남편과 함께 살고 애들도 잘 키우고. (한국인이) 본받아야 혀. 근디 빚땀시 고생혀서, 불쌍혀."

군청 직원의 말을 들었을 때 난 왠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일본인이 같은 신앙의 남편을 만나 이역 땅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약간 미안했고, 불구 남편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데 존경심이 들었다. 용구씨의 얼굴을 다시 봤다. 그러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난 용구씨에게 "밖으로 잠깐 나가자"고 말했다.

용구씨에게 "사연을 듣고 싶다"고 얘기하자 "별로 할 얘기가 없다"고 말했다. 난 군청 직원이 들려준 얘기를 살짝 했더니, 용구씨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런 것도 얘기 하냐"고 되물었다. 난 "한국인도 웬만한 결심을 하지 않고는 장애인과 결혼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혼했느냐, 후회는 하지 않느냐"며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일행이 나와 용구씨를 찾아 인터뷰는 10여 분을 넘기지 못했다. 용구씨가 6000가정이라는 것, 고 3인 아들이 공부를 잘 한다는 것 등 기본적인 사항만 알게 됐다. 나는 용구씨에게 "내일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서울 가서 전화로 인터뷰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질곡속에서도 희망의 빛이

서울에 올라와 진도 기행 기사를 작성하고 용구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용구씨는 "지금 영등제(진도 바닷물이 5월초 갈라지면서 벌이는 축제) 준비로 바쁘니 다음에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전화 통화는 다시 이뤄지지 못했다. 출장과 취재 약속이 바쁜 나는 매일 마음속으로 '내일'만 외쳤다. 마음에 부담만 쌓였다.

다행히 6월말 나는 '관매도'를 취재하려고 다시 진도를 찾았다. 군청 문화공보실에서 용구씨를 반갑게 만났다. 나는 "한 30분 만 시간을 내 얘기를 하자"며 용구씨의 자리로 다가 갔다. 용구씨는 "30분 가지고 될까요?"라며 농담을 건넸다. 이야기를 하는 다키구치씨는 담담했다. 19년의 고생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는 강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용구씨는 1956년 후지산이 보이는 일본 야마나시(山梨)현 후지요시다(富士吉田)시에서 태어났다. 동경에서 버스로 2시간 쯤 걸린다고 한다. 다키구치씨는 내성적이고 매우 예민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친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계 만드는 회사에 취직한 다키구치씨는 23살 때 거리에서 통일교를 전파하는 한 식구를 만나 통일교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신앙심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교회는 매주 나갔다고 한다.

27살이던 1982년 한국을 방문한 용구씨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게 된다. 경기도 양주시 수택동에서 1주일 동안 수련회에 참가한 용구씨는 장애인들이 참가하는 기도회를 보려고 잠실체육관 지하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한 남녀 200여 명이 문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문 선생께서는 설교 중 한 남자를 가르치며 "성실한 청년인데 몸이 불편하다. 그렇지만 믿음이 좋다. 누가 신부가 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용구씨는 갑자기 손을 들었다. 마음 속에서는 끊임 없이 '안된다'는 갈등도 있었지만 손을 들어 그 자리에서 축복을 받아 '6000가정'이 됐다고 한다. 남편 이길삼(55)씨는 19살 때 친구가 잘 못 쏜 공기총에 머리를 맞고 왼쪽 반신불수가 됐다고 한다.

"왜 손을 들었느냐"고 내가 물었다. 용구씨는 "어렵게 (장애인들이) 이 자리에 왔는데, 축복을 못 받으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키구치씨는 "믿으실지 모르지만, 한국에 오기 전부터 '넌 장애인과 살아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며 "맘속으로 '저는 신앙심도 깊지 않고, 부모 반대도 극복할 수 없고, 자신도 없다'는 등 부인해도 계속 들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태였는데, 참부모님이 말씀하셔서 하늘의 음성이 이 사람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서 손을 든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다키구치씨는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기모노 디자이너인 용구씨의 부친 다키구치 이사무씨는 "교회에 나가지 말라"며 감금까지 했다. 이런 갈등은 3년간 계속됐다. 다키구치씨는 당시 상황을 이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절 믿었던 것 같아요. 한 번도 아버지 말을 거역하지 않아 결국 제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그러나 용구씨는 부친의 바람을 져버렸다. 용구씨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다키구치씨는 고급 식당으로 딸을 데려가 생선초밥을 사 먹이며 "너 같은 딸은 없는 셈으로 친다"고 말하면서 절연을 선언했다.

1985년 10월 일본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남편과 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솔직히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죠? 갈등을 하지 않으셨나요?" 도발적인 질문을 건넸다. 용구씨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1984년 12월 시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려 진도를 찾았을 때 화장실에 전깃불이 없고, 화장지가 아닌 종이를 사용하고 있어 많이 당황했어요. 서울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진도는 바람도 거세고 너무 멀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일 동안 한국에 머문 뒤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갈가 말까' 고민을 많이 했죠"라고 솔직히 털어놨다. 이런 갈등 속에서 그녀가 남편을 선택한 것은 종교와 측은지심이었던 것 같다. "제가 장애인(남편)을 버리면 다른 사람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또한 거짓말을 하면 평생 가책을 받으리라는 것도 무섭고요."

용구씨의 신혼생활은 처음부터 어려움이 따랐다. 수택동의 신접 살림집에 갔을 때 말이 안 나왔다고 한다. 용구씨는 "일화 공장 수위로 근무하는 남편이 방 한 칸은 마련해 놨더라고요. 그런데 봉급은 30여만 원을 받는데 방값으로 매달 5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해요. 나중에 들었지만 보증금 100만 원도 회사에서 빌렸더라고요. 봉급수준에 비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 (남편에게) 옮기자고 했죠. 남편은 '그러면 좁은 방으로 가야 하는데' 라고 말해요. 괜찮다고 했죠. 또한 살림살이는 이불과 요 한 채와 수저 한 벌이 전부였어요. 제 것은 없더라고요. 일본에서 가져온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도마와 접시, 밥그릇 등 식기류를 사서 밥을 지어 먹었죠"라고 덤덤하게 말을 했다.

용구씨의 뜻대로 남편은 방을 옮겼다. 전세 100만 원짜리 방은 둘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비좁았다. 1986년 8월 아들 권우(17·진도고3)군이 태어났다. 다키구치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수택동 살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빚도 없었고 일정한 봉급을 타면서 아들 커가는 것을 보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는데…"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용구씨는 딸 가주(14·진도중1)양을 낳은 해인 91년 남편의 고향인 진도로 낙향했다. 이는 남편이 "고향에 돌아가 활동하라"는 문 선생님의 말씀에 따른 것. 회사에서는 "몸도 불편한데 고향으로 뭐하러 돌아가느냐"며 말렸지만, 남편은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진도 생활은 막막했다.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가까운 친척이 없어 타향 같았다고 한다. 용구씨는 남편과 살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죽었다'는 생각을 한 것처럼 또다시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막막했다고 한다. 낙향 첫 해는 일자리를 잡지 못해 교회에서 생활했다. 퇴직금 300만 원도 1년만에 다 까먹었다.

1992년 말 다키구치씨는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편 친척이 경리 자리를 얻어줘 취직을 했다. 비록 40만 원의 적은 월급이었지만 일정한 돈이 들어와 가계에 숨통이 트였다. 남편도 소와 돼지 머리 털깎기를 해서 한 마리당 5000원을 받았다. 돈을 꽤 모았다. 1994년에는 경매에 넘어가는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외딴 농가 한 채를 500만 원에 샀다. 비록 지붕이 뚫어져 비가 새고 담이 허물어진 낡은 집이었지만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용구씨를 또다시 져버렸다. 집을 장만한 뒤 얼마 안 돼 도축장이 폐쇄돼 다키구치씨 부부는 실직을 했다. 용구씨는 바느질을 배워 삯바느질에 나섰다. 한복 치마 하나에 5000원, 저고리는 1만원을 받았다. 당시는 경기가 좋아 신혼부부들이 한복을 많이 장만해 주문이 밀려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삯바느질도 2년을 넘지 못했다. 1997년부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한복 주문이 뚝 끊겨 생계가 막막해졌다.

군청 일본어 강사를 한 인연으로 1997년 7월부터 진도군청 문화관광과에서 취직을 했다. 용구씨는 이때까지 유지해 온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화했다. 군청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려면 한국인이어야만 한다는 규정 때문이라고 했다.

용구씨가 받은 월급은 60만원(보너스는 400%) 정도. 남편이 벌이가 없는 상태에서 용구씨가 가계를 꾸려나가다 보니 빚만 늘어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 용구씨네 가계 빚은 현재 3000여만 원. 집과 가재도구는 지난 1월에 차압 당했고, 용구씨의 월급도 압류 당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군청에서 용구씨의 사정을 카드사 등에 말해줘 압류율을 50%에서 30%로 낮춰줬다는 것. 월급 42만여 원과 용구씨의 남편 이씨가 국가에서 받는 장애인수당 20여만 원으로는 네 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버겁다.

용구씨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부분은 아이들. 용구씨는 "애들이 (가난의) 피해자"라며 "큰 아들이 성실하고 공부도 잘해 장학금을 받아오는데, 이 돈이 아들 대학 입학금으로 적립되지 않고 생활비로 들어가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목멘 소리로 말했다. 담담하게 얘기를 이어오던 용구씨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했다.

그녀에게 희망은 자식이다. 아들은 전교에서 최상위권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 한다고 한다. 수능 모의고사 성적도 370∼390점에 달해 담임선생님은 "조금만 더 하면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다"고 독려하고 있다. 용구씨 아들은 그 흔한 학원수강이나 과외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3학년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를 하지만 한 달에 35만원하는 기숙사비를 마련하지 못해 아침 6시30분쯤 집을 나서 오후 11시30분쯤 집에 돌아온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다고 한다.

용구씨는 "애들이 속이 깊다"며 "살아온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히려 요즘은 제가 아들에게 위로를 받아요. 아들은 '엄마 힘드신데, 제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은 공부를 잘 하는 방법뿐인 걸 잘 알아요. 제가 열심히 공부할 테니, 어려워도 조금만 참아요'라고 자주 말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면서 한 동안 끊겼다. 이 얘기를 듣고 있는 나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용구씨는 "아들이 마치 아버지 같다"며 다시 밝은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다.

'아버지'란 말이 나온 김에 용구씨 부친에 대해 물었다.

"생존해 계신지요?, 지금도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시나요?."

"1990년 2월 작고하셨어요."

"유언은 있었나요?"

"예. '케이코가 한국 남자(용구씨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돌아오면 너희가 책임져라. 너희는 게이코 때문에 대학 나와 자리잡고 있으니까'라고 동생들에게 말씀하셨대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용구씨는 그동안 꾹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눈물은 짧았다. 주위에 군청 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어 용구씨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1남 3녀 중 장녀인 용구씨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 동생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용구씨 부친은 용구씨가 첫 애를 낳았을 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리고 일본에 간다고 말했을 때도 "됐다"고 거부할 정도로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언을 통해 용구씨 부친이 얼마나 용구씨를 걱정하고 있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나도 눈물이 나고 목이매 한 동안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한국 와서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일본에 있으면 편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일본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니까, 저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 고생이 고생으로 끝날지 좋은 결과를 맺을지는 두고 봐야겠죠. 사실 몇 번이나 이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용구씨는 비관보다는 낙관적인 자세를 보였다. 솔직한 태도가 돋보였다.

인터뷰는 1시간 30여 분이 지난 뒤에 끝났다. 용구씨는 "이제 좀 속이 풀리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아무에게 하지 못한 얘길 해서요"라는 말로 얘기를 마쳤다. 그는 군청 사무실을 나서는 내게 "제가 말했죠. 30분으로는 안된다고요"라며 밝게 웃었다. 시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덧붙임

1. 인터넷 '네이버' 검색창에 '용구혜자'를 치면 용구씨가 지난해 '아름다운 관광 한국을 만드는 사람 10인자' 상을 받은 뒤 한국일보 등 5개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가 나옵니다.

2. 글에 대한 문의사항 / 세계일보 신진호 기자 ☎ (02)2000-1297, 011-9019-6797.

3. 용구혜자씨는 현재 진도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도움주실 분들은 교회를 통해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061)542-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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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zvgemqy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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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현님의 댓글

6천가정인데 우연히 선배가정 홈에 들럿다가 같은 6천형제 이야기를 읽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그녀의 헌신적인 삶은
참사랑의 실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늘이여 이가정에 크신축복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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