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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길재를 기리는 채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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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은, 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대학자인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건립하였다.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였다.
벽체가 없고 기둥만 16개로 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중앙에 방 1칸을 만들고 사방을 마루로 하였다. 경역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敬慕閣), 구인재 (求仁齋)와 비각 등의 건물이 있다.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채미(採薇)’는 고비를 캔다는 뜻으로 중국 주(周)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비를 캐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복습차원에서 관련된 성삼문의 한시를 추가 합니다)
란하사(欄河祠)
當年叩馬敢言非(당년고마감언비)
大義堂堂日月輝(대의당당일월휘)
草木亦霑周雨露(초목역점주우로)
愧君猶食首陽薇(괴군유식수양미)
말고삐를 붙들고 그르다고 하였네
아 그 충성 해와 달 같이 당당하구나
초목도 주나라 땅에서 자랐는데
그대여 그 고사리를 먹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란하]는 강 이름. 上都河라고도 하는데, 내몽고에서 발원하여 만주 熱河省의 경계를 지나 발해로 들어온다. 이 강가에 백이. 숙제의 사당이 있다.
[首陽] 首陽山. 중국 산서성 영제현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은 곳.
* 작자 성삼문은 집현전 출신 문인으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며, 무장인 성승의 아들이다. 훈민정음 창제시에는 요동과 중국을 드나들면서 글자의 음운을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로서 옥쇄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으며, 이듬해 중국 사신이 올때 아버지 성승과 박팽년, 이개등과 거사를 모의하여 세조를 죽이려 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모두 잡혀서 극형을 당했다.
* 이 시는 은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무왕을 달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은 백이와 숙제의 묘를 두고 자신의 생각을 읊은 것이다. 자신이 섬기던 왕조를 멸망시킨 무왕을 섬기지 않을 바에는 고사리도 캐어먹지 말것이지 무엇때문에 고사리는 캐어 먹었느냐는 원망과 한탄이 이 작품 속에 배어 있다. 시인이라면 그대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벽체가 없고 기둥만 16개로 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중앙에 방 1칸을 만들고 사방을 마루로 하였다. 경역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敬慕閣), 구인재 (求仁齋)와 비각 등의 건물이 있다.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채미(採薇)’는 고비를 캔다는 뜻으로 중국 주(周)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비를 캐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복습차원에서 관련된 성삼문의 한시를 추가 합니다)
란하사(欄河祠)
當年叩馬敢言非(당년고마감언비)
大義堂堂日月輝(대의당당일월휘)
草木亦霑周雨露(초목역점주우로)
愧君猶食首陽薇(괴군유식수양미)
말고삐를 붙들고 그르다고 하였네
아 그 충성 해와 달 같이 당당하구나
초목도 주나라 땅에서 자랐는데
그대여 그 고사리를 먹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란하]는 강 이름. 上都河라고도 하는데, 내몽고에서 발원하여 만주 熱河省의 경계를 지나 발해로 들어온다. 이 강가에 백이. 숙제의 사당이 있다.
[首陽] 首陽山. 중국 산서성 영제현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은 곳.
* 작자 성삼문은 집현전 출신 문인으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며, 무장인 성승의 아들이다. 훈민정음 창제시에는 요동과 중국을 드나들면서 글자의 음운을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로서 옥쇄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으며, 이듬해 중국 사신이 올때 아버지 성승과 박팽년, 이개등과 거사를 모의하여 세조를 죽이려 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모두 잡혀서 극형을 당했다.
* 이 시는 은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무왕을 달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은 백이와 숙제의 묘를 두고 자신의 생각을 읊은 것이다. 자신이 섬기던 왕조를 멸망시킨 무왕을 섬기지 않을 바에는 고사리도 캐어먹지 말것이지 무엇때문에 고사리는 캐어 먹었느냐는 원망과 한탄이 이 작품 속에 배어 있다. 시인이라면 그대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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