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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必承)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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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必承) 전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찾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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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4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소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김유정> 본관은 청풍. 어렸을 때 이름은 멱설이. 주로 자신의 생활이나 주변 인물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토속어·비속어를 많이 썼다.

아버지 춘식(春植)과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의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우울하게 자랐다. 고향을 떠나 12세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안회남과 친하게 지냈으며, 이때 김나이(金羅伊)로도 불렸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었고, 1929년 고향 춘성군 신동면 실레 마을로 돌아왔다. 1930년 늑막염을 앓기 시작한 이래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한때 금광에 손대기도 하고 들병이들과 어울려 무질서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1932년 마음을 고쳐잡고 실레 마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세워 불우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1935년 '구인회'에 가담해 김문집·이상 등과 사귀었다. 1935~37년까지 2년 동안 단편 30여 편과 장편 1편(미완), 번역소설 1편을 남겼다. 29세 때 누나 집에서 결핵과 늑막염으로 죽었다. 1968년 춘천 의암호 옷바위 위에 시비가 세워졌다.

♣ 구인회(九人會)

순수문학을 표방하고 문단의 중견급 작가 9명에 의하여 결성된 문학동인회. 발족 당시의 회원은 김기림(金起林)·이효석(李孝石)·이종명(李鍾鳴)·김유영(金幽影)·유치진(柳致眞)·조용만(趙容萬)·이태준(李泰俊)·정지용(鄭芝溶)·이무영(李無影)이었고, 도중에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하고 대신에 박태원(朴泰遠)·이상(李箱)·박팔양(朴八陽)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金裕貞)·김환태(金換泰)로 교체되기도 하였으나, 9명의 회원수에는 항상 변동이 없었다. 이상과 박태원이 중심이 되어 《시와 소설》이라는 기관지를 펴냈다. 30년대에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3∼4년 만에 해체되었다.

♣ 안회남(安懷南, 1910년 11월 15일 ~ ? )은 한국의 소설가이며 문학평론가이다. 본명은 안필승(安必承)이다.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외아들로, 경성부에서 출생해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휘문고보 동창인 소설가 김유정과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김유정이 요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편지글이 안회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髮)〉로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 구인회 동인들과 함께 활동을 했던 안회남의 초기 작품은 심리 묘사 위주로 신변을 다룬 사소설(私小說)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후 급격한 경향의 변화를 보인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 일본에 1년가량 징용으로 끌려갔다온 후로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냈고, 월북 이후로 추정되는 1948년 발표된 중편인 《농민의 비애》는 미군정의 폭정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일제 강점기보다 더 비참해지고 있다는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다.

광복 후 좌익 계열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이어 조선문학동맹 결성에 참가하여 소설부 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경에 월북하였고, 한국 전쟁 시기에 종군작가단에 참가하여 서울에 왔다가 박태원, 현덕, 설정식 등 아직 월북하지 않고 있던 문인들과 함께 북조선으로 돌아갔다. 1960년대 숙청되었다는 설만 있을 뿐, 1954년경까지의 활동만 확인되었고 이후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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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박순철님의 댓글

무르팍이 멀쩡할 때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답니다.
나도 내년이면 지공선사가 되는데
지금부터 다니는 연습을 부지런히 하렵니다.
나도 혼자라도 김유정역-- 다녀와야 할까 봅니다.

진혜숙님의 댓글

김유정역 가고 싶습니다.
김명렬위원장님은1* 유명인사와 함께 하시니 꼭 아우와 형님같네요.
김명렬위원장님 2* 형님과 아우같네요. 김유정역에서는 아무래도 의상을 똑 같이 하자는
약속이라도 있으셨어요? 더위가 짙어지면 짙푸른 하늘 색이 보는 사람도 시원 해 집니다.

유노숙님의 댓글

아주재미있는소설이니 이따가 다시 읽어 보렵니다.
지금 어디가야 하니 이렇게 라도 크릭 했다는 표시 하고 갑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위 편지는 김유정이 세상을 뜨기 11일 전에 평생지기였던 안필승(소설가 안회남 : 그도 소설처럼 살다가 지금은 어떤 결말의 인생이 되었는지 모르게 월북했었던 인물이더군요)에게 보낸 편지랍니다.

김유정 역은 한국 유일의 인명역이며, 새로 개통된 경춘 전철선으로 춘천가기 바로 전에 위치하고, 그 마을 전체가 지금은 김유정 덕분에 큰 혜택을 보는듯 하고, 실레마을과 금병산(652m)은 적당한 산행과 나들이에 아주 좋은 코스일 뿐만아니라 문학관 뒤의 식당에서 파는 막국수와 닭갈비는 별미로서 문학기행, 맛집여행, 도보산행을 겸하여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을 사신 김유정님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지만, 직접 가실 분들의 흥미가 반감되지 않도록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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