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도순
글마당
[수필/일기] 분류

부천의 삶

컨텐츠 정보

본문

부천의 삶

인생살이는 한마디로 “먹고 자고 가고 오고 좋고 나쁘다”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부천이란 도시는 나에게 갖가지 사연을 안겨준 마을 뒷산과 같고 마을 어귀에 있는 둥구나무 같다. 그저 생각나는 20여 년 전 부천의 삶은 이러했다. 기억이라는 것이 기뻤던 일들은 까마득해지고 나쁜 일들은 먼 세월이 흘러도 금방 되살아 나는 것 같다.

부천에 살면서 나와 장남이 각기 교통사고를 당한 불운을 겪었다.

이 지구상에 숱한 전쟁으로 사망한 수보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수가 더 많다는 통계에 비교한다면 죽지 않고 경상만 입은 것에 크게 감사할 일이다. 교통사고는 해뜨기 전의 으스름한 새벽녘이나 가로등이 켜지기 전의 날이 저무는 무렵에 발생할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이 시각에 만일 비까지 내린다면 불운이 야기될 개연성이 갖추어진 셈이다. ‘불행은 방심에서 온다!' 는 말처럼 운전자가 이 거미줄에 걸린다면 검은 그림자는 일순간이다.

네 자녀를 태우고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한 아슬아슬한 사건도 생각난다.

무심결에 우측 백미러로 뒷바퀴 휠이 튀어나와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이 보이는게 아닌가. 순간 차체는 술에 취한듯 핸들이 비틀거렸다. 간담이 서늘해져 재빨리 우측 갓길로 들어서 속도를 줄였다. 펑크가 난 우측 뒷바퀴는 공기가 다 빠져나가서인지 아스팔트의 미세한 요철까지 핸들 잡은 손끝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위험천만한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그 심각함을 알지 못한 철부지들은 킥킥대며 펑크 난 뒷바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 사진이 하냥 사진첩에 남아있다. 그 이후 갓길이 운전자나 탑승자의 목숨과 직결됨을 통감하고 있다.

소사동의 어느 아파트단지에서 생물장사를 할 때다.

생물이란 야채, 과일, 생선을 두루일컬는다. 이 농수산물들은 싱싱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뿐더러 쉽게 팔릴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야채가 시들거나 과일의 색깔이 변색되기 전에 떼온 물건들을 빨리 팔아치우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밑지고 팔거나 집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다. 생선은 냉동시키는 해결책이 있으나 대동소이하다. 그러기에 생물을 파는 상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고 하소연한다. 가락시장이나 노량진 수산시장은 새벽 두 세시경 부터 불야성을 이룬다. 펄떡펄떡 강을 거슬려 오르는 연어 떼같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생존경쟁의 역동성이 새벽공기와 더불어 세 박자 춤을 흥겹게 추고 있다. 한 여름철의 수박, 김장철의 배추, 무는 부천 깡시장이나 부평시장에서 떼어다 팔았다.

3번 시내버스로 출퇴근하며 김포공항내 대행기관에 근무한 적도 있다.

화물청사 내에 출입증을 소지하지 않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 화물청사의 안전을 유지하고 계류장에 있는 여객기를 보호하는 경비업무이다. 드넓은 활주로와 유도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밤낮의 기온차이가 심하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숱한 인파의 헤어짐의 쓸쓸함이 공항에 남아 폭풍의 언덕의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불어대는 바람처럽 밤새도록 활주로와 계류장을 설쳐 되며 헤매는 바람과 친구 되었다.

서울살이에서 낙향한 이런 부천살이는 소사동, 송내동, 중동으로 여러 번 이사 다녔다.

단독주택, 5층 빌딩, 분식가게집, 아파트, 반지하방 순으로 번갈아 살았다. 첫 출발은 소사삼거리 인근의 단독주택이었다. 이곳에서 전세로 살다가 옥상 있는 빌딩 5층에 살면서 숱한 계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이 5층에서 시골에서 올라오신 모친이 중풍으로 3년 여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성심껏 뒷시중을 들어준 아내의 수고로움에 노고를 크게 칭찬하지 못하고 당연한 듯 살아가고 있다.

생물장사에서 팔지못한 재고를 처분할 수 있고 돈도 벌 묘안 같아 분식가게가 딸린 방으로 옮겨 송내동과 소사본동을 왕래하였다. 작은 방이 하나뿐이라 두 딸은 좁은 다락방에 웅크리고 자고 두 아들은 셔터 문을 내린 홀에 맞붙인 식탁 위에서 이불을 펴고 잤다.

훗날 두 딸이 들려준 얘기이다. 둘이 다락방에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옥신각신하다가 유리 창문을 깨뜨리고 말았다. 순간 방에 자고 있는 오빠의 얼굴로 깨진 유리파편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직 무거운 침묵으로 토끼 눈동자들은 내리훑고만 있을 수밖에. 위기일발의 찰나에 오빠가 잠꼬대를 하며 옷 입은 팔로 얼굴을 가려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둘은 후다닥 다락에서 내려와 흩어진 파편들을 치우면서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꿈속에 누군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려고 해서 무심결에 팔로 막았단다.

아마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안했으면 아들은 큰 화를 당했으리라.

이 시절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주인집 텃밭 길체에 얼기설기한 판잣집이 장독을 묻은 푸세식 뒷간이었다. 이미 전매한 중동아파트를 가족들이 한동안 오갈 때까지 수세식과 푸세식을 쓰는 희한한 경험을 되풀이 했었다. 그때는 중동신도시가 입주하는 초기라 송내동에서 철로가 철조망을 들춰 중동으로 가로질러 다닐 수 있었다.

반지하 방은 내가 외국생활을 하던 시절에 아내가 옮겼었다. 그러니 나는 전혀 위치를 알지 못했다. 당시는 휴대폰이 없던 때라 귀국하여 부천행 공항버스에 트렁크를 싣고 오는데 난감하였다. 때마침 학교에 등교하는 딸이 다행히 눈에 띄어 집을 찾아 갈 수 있었다.

어느 장마철 여름이었다. 잠을 막 들려던 차에 얼굴에 차가운 물체가 다가옴을 느껴 웬일인가? 벌떡 일어나보니 배수구가 막힌 빗물이 부엌으로 흘러넘쳐 방으로 밀물이 해안으로 몰려오듯 들어오고 있었다. 온가족은 물 소동에 혼이 나간 듯 난리법석을 피웠다. 막힌 곳을 뚫어서 빗물이 흘러들지는 안했지만 이미 방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내가 중동지역에 선교하던 시절에 아내는 부천에 살면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주방설겆이, 신문판촉요원, 부동산소개업, 화장품 방문판매 등을 전전하며 네 자녀의 살림을 한동안 꾸려 나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에게 부천은 고향과 다름없다. 숱한 애환이 스며있는 거리가 곳곳에 뻗어 있고 골목길의 옛 자취가 여전하다. 비록 먹고 잔 곳의 환경이 현대화 되어지고 오고간 길의 폭이 넓혀져도, 좋고 나쁘던 사연들은 우리 가족의 가슴속에 살아 숨쉰다.

관련자료

댓글 12

조항삼님의 댓글

대숲님과 부인회장님의 화답하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초창기 섭리의 행보가 우리 작은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짧막한 감동드라마에 심령의 전율을 느낍니다. 조흔 글 고맙습니다.

대숲님의 댓글

고종우 회장님이 더 훌륭하네요. 이때가 74년도면 축복받기전 처녀시절인데, 이런 참경을 보고도 축복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형부는 중미의 세인트루시아 아벨 분봉왕으로써 황족권이 되셨으니 가문의 영광이죠. 처제 부부가 돈좀 벌어서 카리브해안에 멋진 왕궁 건립하시길!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카리브해안일 겁니다. 저는 영계에 가기전 한번쯤은 카리브 해안에서 오색바다를 보고픈 꿈을 갖고 있거든요. 이번 하와이 호텔에서 지낼때 룸메이트가 카리브 연안의 한 나라에 살고 있는 선교사인데, 부럽더군요.

고종우님의 댓글

공감대 형성하는 공간임에 틀림 없어요.
코끝이 찡 하네요.
제가 74년도에 범내골 좁은 비탈길을 휘날리는 눈을 맞으며 간신히 올라갔어요.
여기겠다 싶어 아가들의 노는소리가 나는 방을 기웃거렸지요.
다 짲어진 문종이 문살 사이로 인길이 ,인욱이(생질들)가 놀고 있는데
그 애들이 밖으로 나올까봐 언니가 밖에서 끈으로 문고리를 묶었었어요.
얘들아 엄마 어디갔니?
빨래 가셨어요.

곧이어 언니는 엄동설한에 세수대야에 기저기를 빨아가지고 꽁꽁언 손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언니의 얼굴은 부석 부석 바람맞은 무우같기도 했다.
수도세 몇푼 아끼려고 어디메까지 가서 추위에 빨래하고 온것일까~~~

나는 슬그머니 부엌에 가서 쌀통을 열어보았다.
언제 마지막 쌀은 퍼 본것일까 , 어제일까 그제였을까
마지막 쌀알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순간 나는 교구에 가셨다는 형부(라병열) 가 원망스러웠다.
무능력하신가 싶어 불쌍한 우리언니 어떻게 하고 엉~엉 울었고
아픈가슴 찌르니 언니도 함께 붙들고 울었다.

잠시후 언니가 한마디
"얘야 아니다 윗가정어른께서 너의 형부는 천국에 맨 앞자리에 앉으실 분이랬어"

나를 달래고 있을때 형부는 어깨에 자그마한 쌀자루를 메고 오시는 것이였다.

대숲님의 삶의 역사는 우리 선배님들의 광야로정이지요.
공감하여 댓글 달며 은혜로 함께 합니다.
장하십니다.
보석 같은 삶을 표현 하지 않으셨다면 함께 공유 하지 못했을거여요.
이제라도 넓게 넓게 사십시요.

조항삼님의 댓글

참으로 감동적인 글 읽고 잠시 깊은 상념에 빠져 봅니다.
심경으로 나마 가슴이 짠함을 느낍니다. 고뇌의 역경을
순탄하게 극복한 지난 날이 자랑스럽군요.

대숲님의 댓글

이 글은 '부천문학'에 실릴 수필원고입니다. 참부모님 말씀을 모티브로 하여 문학화한 것입니다. 참부모님 말씀중 짧은 문장속에 보석이 박힌 원석들이 많습니다. 그 원석을 가공하여 귀거리나 목거리 보석을 만드는 창작이 필요하죠. 이 글은 참아버님의 '먹고 자고 가고 오고 좋고 나쁘다'라는 인생해석을 작품으로 완성해 본 것입니다. 훗날 단행본을 출판할때는 편집자주를 달아서 참부모님 말씀 원본을 밝혀보는 것입니다. 벤허란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벤허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이판기님의 댓글

부천의 삶... 올만에 홈에 들어와 한 마당 인생살이 잘 읽었습니다. 툉일교회 선교사들의 보편적 일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달랑 왕복 비행기 표 사 쥐어주며 선교 임지로 가라 하셨고 우리는 갔습니다. 그리고 심중에 올올히 새겨진 사연들을 안게 되었지요. 담담히 쓰신 글 속에서 .........대숲님의 항상 웃으시는 얼굴이 떠 오릅니다.

대숲님의 댓글

그렇습니다. '한국1800축복가정30년사' P146에 아내에 관한 소견을 토로했었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선교사님의 삶이 성약시대의 사도행전으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하늘의 승전가로 남아지겠지만,
사모님의 삶 또한 감동적인 소설의 재료가 되기에 충분할듯 싶습니다.

소상호님의 댓글

고개를 떨구나 인데 오타입니다
고개를 숙이나 ...뒷모습이 작게 보이나...
생업전선이 아니라 성업 전선이라...
심금을 울립니다

소상호님의 댓글

용기있는 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삶은 주어진 몫이기에
어렵고 고통스러워
서라도 순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인 것을
글 중에서 새삼 느끼며 또한 마음
깊숙히 다가 옵니다

고생이 단순히 살기위하여 하였다면
의미가 덜하여 고개를 덜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길이기에
보람과 가치의 옷으로
갈아입게 되어 당당하는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이밤에
은혜주셔서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