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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공부-1 <우리나라 속담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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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con_11.gif 속담에 관한 공부 -1

<우리 나라 속담의 특징>

우리 나라 속담에 등장하는 단어 중 빈번한 10개는 개(142), 똥(106), 물(100), 소(87), 집(86), 사람(85), 밥(83), 말(77), 발(足,71), 떡(66)으로 비속성(卑俗性)과 일상성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서울대 심재기 교수가 <속담의 종합적 검토>란 논문을 통해 밝힌 것이다.

심 교수는 속담을 외형 의미 기능 등으로 나눠 검토하고 민속자료로서의 특성도 검토했는데 빈도가 가장 잦은 10개 단어에서도 나타나듯이 비속성과 일상성이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또 속담의 생성과 정착과정에 대해 심 교수는 특정 사건과 인물이 계속해 인용되다 속담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소개했다. ‘황정승네 치마 하나 세 모녀가 돌려입듯’, ‘춥기는 사명당의 사철방이라’, ‘변학도 잔치에 이도령의 밥상’, ‘조자룡이 헌칼 쓰듯’, ‘송도 말년에 불가살이’,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같은 속담이 그 예라고 말한다.

이 같은 과정으로 현대에 정착된 몇 가지 속담을 보면, ‘중매 반, 연애 반’, ‘××와 ×××는 허가낸 도둑놈’(사자 돌림),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자’ 같은 것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같은 생성 과정과는 다르게 정착 과정에서 와전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예를 들었다.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대표적인 예. 본래는 ‘굴원이 제 몸 추듯’인데 민간에서 굴원(屈原)을 ‘구렁이’로 발음, ‘구렁이 제몸 추듯’으로 되고,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란 내용상의 변화까지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굴원은 중국 초 나라 때의 시인으로 <이소(離騷)> 등 격조 높은 서정시를 많이 남겼으나 만년에 정치적으로 불운해 방랑생활 중 술에 취해 춤을 추며 자기를 몰라주는 세상을 비웃었었다.

또 기본 뜻은 바뀌지 않았으나 표현이 바뀐 경우도 국내 속담에는 자주 눈에 띄는데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경우를 들어 설명했다. 심 교수는 이 속담이 ‘황정승의 곯은 계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황희 정승이 너무 청빈하므로 하루는 임금이 날을 잡아 그날 들어오는 진상품을 모두 황 정승 집에 보내도록 조치했다는 것. 그러나 그날 큰 비가 내려 계란 한 꾸러미밖에는 들어온 게 없었는데 그나마 곯은 것이었다는 것. 이 고사가 서거정에 의해 ‘계란개골(鷄卵皆骨)’, 조재삼(趙在三)에 의해 ‘계란유골(鷄卵有骨)’로 기록됐는데 이 중 ‘골(骨)’이란 ‘곯았다’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나 후에는 ‘뼈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생기고 정착되는 속담에 대해 심 교수는 속담이 서민사회의 언어적 거울이며 특히 언어미학 또는 유희의 측면에선 그 기능의 다양성이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같은 우리 언어생활 속의 속담은 점차 퇴색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옛날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많이 쓰이던 은유나 간접표현 등의 언어습관이 퇴화하여 직설법으로 변하고 있는 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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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굴원과 중국 단오의 유래

屈原의 離騷(이소) :굴원은 중국 역사상 위대한 애국 시인이자, 전국시대의 걸출한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초나라의 좌도(左徒 : 초나라의 관직명)를 맡았다. 또한 늘상 초나라 회왕과 함께 정사를 연구하고, 법령을 세워 회왕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굴원이 생활한 연대는 전국의 후기로서 각국 간의 겸병과 전쟁이 날이 갈수록 격렬하던 때였다. 당시 가장 강대한 진나라는 적극적으로 대외 확장을 하며, 기필코 6국을 합병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형세에 직면한 굴원은 대내적으로는 적극적으로 개혁 정치를 주장하고, 법제를 바꾸어 부강을 도모코자 하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제나라, 위나라, 조나라 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진에 대항코자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일련의 귀족 세력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늘 회왕 앞에서 굴원에 대해 모함하니, 회왕은 이렇듯 모함하는 말을 듣고 서서히 굴원에 대하여 소원해지기 시작하였다.

굴원의 재능은 실천되지 못하였고, 정치적 포부 역시 실현하지 못한 채 멀쩡히 눈을 뜬 상태로 초나라가 쇠락해 감을 보아야만 했으니, 그로서는 내심 비분강개할 따름이었다. 그는 가슴 가득한 애국에 대한 열정을 시를 써서 토로하였으니, 그것이 저 유명한 《이소(離騷)》다. 이 위대한 문학 작품은 애국주의 정신이 충만한데, 굴원의 강렬한 정의감과 진리를 추구하는 결심이 반영되어 있다.

주나라 난왕 8년(기원전 307년)에 진나라의 소왕(昭王)은 즉위 후 비교적 유연함을 취하여 초나라를 끌어당겨 각 나라의 ‘합종’을 격파하기 편하게 하고자 하였다. 초나라와 진나라의 결맹은 합종에 참가했던 다른 나라들을 자극하였다. 기원전 304년,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 등의 세 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 오니, 초나라 회왕은 태자 횡(橫)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진나라에 원조를 청한 후에야 비로소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후에 태자 횡이 초나라 왕이 되나 여전히 진취적인 이상을 도모하지 않고, 간신배를 등용하며 나라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굴원은 조정이 부패하여, 국가의 운명이 점점 위급해짐을 보고는 근심으로 마음이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몇 통의 상서를 계속 올려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에게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국내 정치를 혁신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관직을 박탈당하고, 국경으로 유배되었다.

굴원은 유배 생활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초나라 경양왕을 그리워하며, 경양왕이 하루빨리 그를 다시 수도로 불러들여 국가의 운명을 구하도록 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고 또 일 년이 지나도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부른다는 소식은 없었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고 수도인 영(郢)을 점령하니, 초나라 경양왕은 도망을 가버렸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는 초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상심한 나머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그는 초나라가 멸망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고, 초나라의 백성들이 진나라의 잔혹함과 박해를 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5일에 커다란 돌덩이를 안고, 멱라강(漞羅江 : 지금의 상강 지류)에 투신자살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예순둘이었다.

이후, 매년 5월 5일이 되면 초나라가 있었던 중국 남동부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용주(龍舟 : 용모양의 보트) 경기를 하고 쭝쯔(粽子 : 찹쌀에 대추, 호두, 돼지고기, 팥 등을 소로 만들어 넣어 대나무 잎이나 갈대 잎에 싸서 쪄 먹는 음식)라는 떡을 만들어 굴원을 기념하는 의식을 행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서의 단오절의 유래다. 이 밖에도 후대 사람들은 굴원의 고향인 호북성 자귀에 굴원 사당을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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