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만든 다리: 늦깎이 작가의 행복론
컨텐츠 정보
- 0댓글
-
본문
글이 만든 다리: 늦깎이 작가의 행복론
문용대(수필가·소설가)
늦가을 아침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다. 퇴근길 공원 벤치에 앉아 간밤에 쓴 글을 다듬고 있노라면, 이 시간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함을 채우는 시간. 나에게 글쓰기는 곧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나답게 숨 쉬는 방법이 되었다.
늦깎이의 일터, 글감의 보고
나는 늦은 나이에도 여전히 격일제 근무로 새벽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는 직장 생활을 이어간다. 친구들은 "왜 그 나이에 일을 하냐?"고 묻지만, 나는 "일하는 게 좋아서."라고 웃으며 답한다.
사실, 일을 하다 보니 사람들과 부딪히고, 세상과 호흡하며 얻는 이야기가 바로 내 글의 소중한 자양분이 된다. 일을 멈추면 글감도 사라질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글쓰기를 위해 계속 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이라는 다리로 이어진 인연들
나는 육십 대 후반에 수필가로 등단했고, 일흔 중반인 금년에 소설가가 되었다.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글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특히, 글이라는 다리를 건너 서로의 세계로 들어선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을 때, 나는 큰 행복을 느낀다.
강원도 춘천의 장은초 작가가 동화집 『별똥별 미워』를 보내왔다. 새 책 특유의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장은초 작가는 이미 『발가벗고 춤추마』, 『집 나면 개고생? oh no!』 같은 유쾌하고 솔직한 제목의 수필집들을 네 권이나 낸 분이다. 이번이 첫 동화집이라니 더욱 반가웠다. 이 만남은 벌써 세 번째 책 선물로 이어졌다. 이전에 보내준 『엿을 사는 재미』, 『연필 이야기』에 이어 이번 책 속에도 응원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 몇 글자가 내 하루를 늘 환하게 밝혀준다.
장 작가는 내가 쓴 글을 어디선가 읽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찾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글로 인연을 맺었다. 장 작가가 TV '우리말 겨루기' 마지막 한 문제에서 우승을 놓쳤을 때, 마치 내 일처럼 "아깝다!" 하고 소리쳤던 순간은, 글로 연결된 따뜻한 연대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런 인연은 종종 찾아왔다. 제주도에서 문학지 『수필오디세이』를 만드는 김순희 편집장도 내 글을 읽고 원고 청탁을 해왔다. 멀리 제주도에도 내 글이 닿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밖에도 김해의 『한국예인문학』, 군산의 『지필문학』 등 여러 월간지, 계간지, 그리고 『코스미안뉴스』와 『브레이크뉴스』 두 인터넷 매체에도 주 1회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코스미안뉴스』는 2021년까지 글을 싣다가 올해 다시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한 문학사 발행인과 행사장에서 잠시 만난것 외에는 이 모든 인연의 관계자들과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글로만 연결된 사이이다. 문학 카페에 글을 올릴 때면 '좋아요' 하나, 댓글 하나에 기뻐한다. 특히 며칠 만에 내 글을 백 명이 넘게 읽은 것을 보면 참 행복하다. 내 글이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읽고 뭔가 위로가 되고 좋은 감정을 느낀다면 글 쓴 사람으로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글은 읽어 주는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엄춤과 다시 시작하는 기쁨
8년 전, 수필문학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글감처럼 느껴졌다. 손만 대면 글이 쏟아져 나와 두 권의 수필집을 냈다. 하지만 이후 3년 동안 공백기가 찾아왔고, 컴퓨터 앞의 빈 화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글이 막히니 사람과의 관계도 막히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올해 들어 다시 시동이 걸렸다. 멈춰 있던 마음의 톱니가 맞물리듯, 다시 40편 넘는 글을 썼고, 올해 『문학고을』을 통해 소설가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제는 시와 희곡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배우지 못한 것,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이 커지며 욕심이 생긴다.
늦깎이 작가의 행복론
나는 어릴 때 가난해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았다. 늘 남보다 더 노력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글쓰기가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었다. 글을 쓰면서 비로소 나를 발견했다.
퇴근길 벤치에 앉아 세상과 조용히 대화한다.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새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그 모든 것이 글이 된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오직 나와 글만이 존재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시간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숨을 쉬는 것처럼, 글쓰기는 나에게 생존의 방식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쓴다.
어제 만난 친한 여성회원이 내게 했던 말이 귀에 머문다.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대성했을 텐데…"
많이 늦어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그렇게 글 써서 뭐하나? 돈이 되나?"라고 묻는다면, 나는 "행복해지지 않느냐."고 웃으며 답하겠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글을 쓰며 느끼는 충만함,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했을 때의 뿌듯함,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의 전율. 그것들이 나를 살게 한다. 오늘도 나는 펜을 든다. 비록 나이 들고 느리지만, 아직 할 이야기가 많고 쓰고 싶은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친다.
이제 '작가'라는 호칭이 낯설지 않다. 예전처럼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행복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관련자료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