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에서_프에르토-리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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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erto Rico)현지활동보고
❇남양주에서 프에르토-리코까지
기간: 2007.9.05~9.15.
교역자회의에서 프에르토-리코를 남양주교회의 파송임지로 선택하게 되였다. 그런데 국가메시아는 명단에는 없었다. 나중에야 프에르토-리코는 미국령인 것을 알게 되였다. 프에르토-리코에 대한 사전정보는 인터넷으로 그곳의 외적인 내용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남미대륙회장이신 조정순회장께 연락하여 그곳에는 2가정이 살고있다는 말씀을 듣고, 선교본부를 통해 프에르토-리코의 지도자와 이메일(E-mail)로 겨우 연락이 되였다.
프에르토-리코란 이름은 부자 항구란 의미를 지닌 단어 이다. 인구는 392만 명이고 미국령으로 되여 있으며 면적은 우리나라의 20/1정도인 8,900㎢이며 수도는 산후안이다. 카리브 해 지역에서 가장 큰 섬들 중에 하나인 푸에르토-리코는 남미대륙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알려져 있다. 기후는 열대성기후로 9월의 평균기온은 31도이고 우기(雨期)이다. 그리고 정치적상황은 미국과같이 양원제로 되여있으며 이곳의 언어(言語)는 일반적으로는 거의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영어도 사용하기도 한다.
지교회인 지금교회와 연계하여 가기로 하였으나 지금교회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양주교회만 가기로 하고 결국 이연우장로님,손송남장로님,전재무장로님,에이꼬상 우두호교회장,5명이 결정 되여 09.05.10시15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였다. 비행거리만 20여 시간과 중간에 4번의 비행기를 갈아타며 기다리는 시간을 더하면 약30여 시간이 소요되는 장거리의 시간은 지루하기도 하였으나 임지에 대한 생소한 생각에 궁금함이 더욱 발동함은 무슨 연고일까?
미국의 마이애미 공항을 10시30분에 출발하여 2시간반 만에 도착하니 KingsBury라고 하는 지도자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자동차로 약20여분 만에 도착한 곳은 교회건물이 아닌 Pedro/Akemi씨의 2층 가정집 이였으며 한 달 임대료가 65만원나 하는25평정도 되는 작은 월세 집이다. 두부부는 직장관계로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나 에이꼬상과 미리 전화연락이 되여 일단 그곳에 여장을 풀었다. 베드로/아께미씨부부와 자녀들이 다함께 모인시간은 저녁9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서로 상견례를 하고 아케미씨가 수리하기 위하여 비워 두었던 옆집을 미리 빌려 놓아서 우리는 그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첫 잠을 청하였다. 건물의 물 사정이 괜찮은 편이어서 더운 날씨임에도 우리는 큰 불편 없이 지내게 되였다.
프에르토리코 교회 현황은 1982년Pedro Moralcs/Akemi Arashiro부부가축복후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 환고향 명령으로 주체의 고향인 프에르토 리코에 살게되면서 시작였다. 1995년경 일본맴버 약400명이 투입되여 활동하다가 10여명이 감금되기도 하였으며. 이때 통일교에 대한 인식이 잘못 전해져서 전도활동에 영향을 준 것같다. 그동안Kings bury (킹스베리)라는 현 국가지도자가 전도 되였으며 예전에는그래도 5가정이 살았었는데 이제는 두가정만 남게 되였다고한다.
이곳에는 킹스베리씨 가정과 베드로/아께미가정의 두가정이 있는데 킹스베리가정은 99년 기성가정으로 많은 영적인 체험을 통해 전도된 사람이다. 그 부인이 치매 병으로 인하여 부부가 같이 고생하고 있어서 안타갑기만 하였다. 그의 간증은 너무도 실감적이었다. 젊은 시절 성서를 열심히 읽던 중 예수님께서 나타나 십자가에 돌아가시러 오시지 않았음을 직접 깨닫게 하시고 14일수련후 원리에는 감동을 받았으나 참부모님을 의심하다가 다시 영접하기까지의 영적인 체험담은 메말랐던 우리의 가슴에 촉촉이 적셔지는 부활의 단비였다. 그는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엔지니어로 둘째아들은 항해기술자로 잘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베드로/아께미씨의 가정은 1982년 2,100쌍 축복가정으로 4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큰딸 빅토리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브릿지포드대학에 장학생으로 금년에 들어갔고 둘째딸 카테리너는 고등학교2학년이며 운동을 좋아하여 매일 축구를 하러 다닐 정도다. 3째딸 글로리아는 성격이 정적이어서 우리와 잘 어울려 순결켄듸를 나누어줄 때도 같이 활동하였다. 마지막으로 4째는 아들로서 이름은 성덕(成德)이다. 그 이름이 한국이름이어서 유래를 물었더니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한국선교사인 김신욱씨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인연(因緣)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김신욱씨는 남양주의 퇴계원과 신월리에서 조산원을 운영하며 권사님의 이름으로 많은 신유의 역사도 하시며 초창기의 식구들을 뒷바라지하여 경기북부의 식구들은 거의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이 아마도 우리남양주교회식구가 이곳에 오게 된 동기가 되였나 보다고 생각하였다.
다음날 9/7일 아침경배식겸 훈독회를한 후 이곳에서 약20분 거리에 있는 성지에서 기도를 하고 옛스페인과 미국의 격전지인 샨후안성을 둘러보았다. 빨간 흙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성벽은 왼만한 함포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옛날 노예의 사고팔던 시절이 이곳 에서도 성행하였다 하니 그들의 한맻힌 영혼들의 구원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다음은 프에르토-리코청사앞에 있는 위령탑을 방문하여 기도하게 되였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은 1950년 6.25동란초기에 UN군의 이름으로 프에르토-리코의 젊은 군인 2,000명이 참전하여 800여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북한공산군의 남진을 3일간이나 저지시킴으로서 우리 군과 유엔군은 반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시간을 벌수 있었다고 한다.
섭리적으로 볼때 6.25동란은 흥남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던 평화의왕이신 참부모님을 해방시키는 전쟁이기에 우리는 성전(聖戰)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성전(聖戰)인 한국전에 이곳 프에르토-리코의 젊은이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800명여명이나 산화해 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온 또하나의 동기라고 생각되였다.
9/8. 이곳 프에르토리코애서 한국전에 참전하였던 2,000여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뜻으로 순결켄디2,100개를 만들어 (캔디2100개에 성주를 묻혔음) 대형백화점앞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배운 스페인어가 “토마-돌쇠”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란 말이다. 그다음에 그 답변으로 고맙다는 말이“크레시아시스”란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캔디를 나누워 주면서 “토마-돌쇠”라고 하면 여지없이 “크레시아시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9/9. 오늘은 루터 크리스찬교회를 방문하였다. 약150여명이 예배볼수있는 자리에 우리5명의 대원과 킹스베리협회장과 아케미씨의 가족4명을 포함하여 10명이 그 교회의 10여명의 성도가 합하여 22명이 예배를 드리게 되였다. 우리가 가서인지 그 교회의 신부님은 아주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였으나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로만 듣던 남미교회의 몰락해 가는 현상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교회의 예배인원 10명중 7명은 70~80대의 노인들이였으며 젊은 사람은 2명의 딸과 60대로 보이는 어머니였다. 우리는 특별출현으로“강변 살자”와“홀로아리랑”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이곳에는 2주전에 미국의지도자가 와서 축복식을 하였다고 해서 특별한 행사는 하지 않았다.
9/10 .위령탑에서 성주를 뿌리며 기도하였다. 참부모님과 우리나라를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영인들을 위로하고 축복하고 싶은 간절한 심정으로 성주를 뿌렸다
9/11. 이슬람지도자 이맘을 만났다. 이 사람은 청평에서 거행된 탄신행사에 참석했던 지도자로 우리와의 인연은 좋은 것 같았다.
오후에는 참가정운동을 전개하였다.
9/12. 프에르토-리코에는 2명의 평화대사가 있는데 그중한분과 만나대화를 나누었다,오늘은 말씀선포와 축복식이 있는 날이다. 저녁7시30분에 시작하기로 되여 있는 행사는 8시가 넘어서야 시작이 되였다. 말씀을 선포하고 축복식을 하고 우리들과 자매결연을 하고 모든 행사를 마쳤다.
❈봉사활동_우리장로님들이 이곳에 오자마자 시간 나는 대로 시행한 봉사활동은 베드로/아케미 가정에 오래도록 방치해 두었던 정수기를 설치하는 일과 고장 난 자전거2대를 수리하는 일이였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온몸에 땀이 흘러내리는 대도 장로님들은 온 정성을 다하여 마지막까지 정수기를 설치하였으며 자전거수리를 끝마치고 자전거1대를 사주기도하였었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물을 상점에 가서 사서 먹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집에서 바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자전거를 탈수있게된 어린자녀들의 눈빛에서 순진한 동심을 읽을 수가 있었으며. 식구라는 공생의 심정으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활동기간동안 9월은 우기(雨氣)임에도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고 카리브 해의 하늘은 너무나 청명했다. 우리가 지내던 숙소의 처마 밑에 제비집처럼 지어진 새둥우리에서 며칠 만에 아름다운 새두마리가 새끼 쳐 쳐나갔다. 그새의 이름이 “바로오마”란 이름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다시 이곳에 바로 오라는 계시적인 말인 것 같았다. 끝으로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본 선교활동에 참여하신 우리남양주교회의 장로님들과 성원해주신 모든 식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하나님과 참 부모님의 사랑과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관련자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