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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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1952~ )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지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 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함꼐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지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지
이제 내가 할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일 것이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詩評
1. 이 시는 황지우 시인이 아내에게 바치는 시 인데요 간단히 말하자면,
황지우 시인이 과거에 조금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아내가
아픔을 같이 나누고 싶다며 고백을 해요. 그 말에 아내는 황지우 시인이
병을 씻어내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어 하루하루 적갈색 병 안의 약을 비워내요.
그리고 현재에는 병이 다 낫고 아내와 살아가는데 지금은 진실되기에 굳이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 않아요. 그리고 노년기가 왔을 때 사랑이 완성되면 그때가서
아내와 한평생 살았던 나날을 되돌아보며 사랑을 확인하겠다. 라는 시에요
이런 남편 어디 없을까요ㅠ
2. <김민정·시인>한 영화감독이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보다 더 맞는 말들이 많아요. 나는 지금 너의 이런 부분이 좋아, 그런데 다음날이 되니까 그게 아니라 다른 점이 좋아….” 사랑이 변하는 거냐며 질질 짜대는 사람들에게 손수건 건네주는 일이야 마른 김에 밥 싸먹는 일처럼 식은 죽 먹기죠. 식은 죽이라면 버릴라 치는 변덕은 사람이, 그 사람의 말이 부리는 거잖아요. 생선 발라먹다 말고 팝콘 통에 손 넣다 말고 우는 여자의 속눈썹에 입 맞추다 말고 사랑한다, 고백 좀 마세요. 네 손톱에 예쁜 달 떴네, 네 엄지손가락 망치처럼 단단한 것 좀 봐 못도 박겠어, 네 쫀쫀한 허벅지 보면 말이 형님 하겠는걸, 눈썰미를 수다로 발휘해 보세요. 결국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맞는 말을 찾아가는 여정 아닐까요. <중앙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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