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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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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를 두고 천천히 감상하세요...
귀한 역사자료들이라 올려 봅니다.
★ 조선왕조 사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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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문은 한북문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홍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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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회식(우편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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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학교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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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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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소학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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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과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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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도성(인왕산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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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보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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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박영효와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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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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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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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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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육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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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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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인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구한말 고종,순종,영친왕..구한말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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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毓祥宮)은 원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봉사하는 사당이었다.
1908년에 저경궁 · 대빈궁 · 연우궁 · 선희궁 · 경우궁이
합사되어 6궁으로 불렀으며,
1929년에 덕안궁이 경내로 옮겨와 7궁이 되었다.
육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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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명성황후가 책봉되기 이전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감고당(感古堂, 현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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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등 비상시 왕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북한산성 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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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자리
경모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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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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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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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창경궁과 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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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천변(川邊)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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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서울 -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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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01.01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황부부사진을 실은 조선일보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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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왼쪽)와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오른쪽)

1905.11.29 경성역 -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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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은 1895년 경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조선왕조에 경찰기관이다.
1890 포도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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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훈장과 학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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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대구 - 서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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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서울 소공동 -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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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서울 - 싸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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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인력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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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전주 - 신흥학교 수업 광경,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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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 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 것이다.
1899 슬픔에 잠긴 고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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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초지진 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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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전차에 오르는 승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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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단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순절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왕실을 위해 충절을 바친 여러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사단이다.
1908년 일제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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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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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 2년(1908)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서있는 사람은 조희연(趙羲淵)과 김윤식(金允植).
1908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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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순종과 대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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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고종의 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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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단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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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짐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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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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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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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정공 민영환의 컬러 유리원판 사진.

1904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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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젖을 먹이고있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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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서당의 서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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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상류층 부인을 태운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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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상류부인과 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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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빨래터에 가는 여인과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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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물지게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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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를 파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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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를 나르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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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버니에게 심신의 아픔을 절절히 적어 보낸 명성황후의 편지 두 통.
청나라제 예쁜 색지에는 대나무와 꽃이,
편지 봉투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1874 명성황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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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0 서울 신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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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0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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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인(우편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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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조선여인(우편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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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의 하나이다.
문의 좌우 성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져 복원되었다.
1892 광희문

관련자료

댓글 2

박신자님의 댓글

과거 조선의 여인들의 사진을 보면 흔히 볼수 있었던 가슴입니다.
우리나라 정서는 정조관념이 더 크다보니 ..
가슴은 하나의 모유통 정도로 생긱하였나 봅니다.
아기들의 수유가 부끄럽지 않게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정해관님의 댓글

☯ 채근담24. 노력해야 진보한다.

아무리 포악한 말이라도 길들이면 달릴 수 있고,
튀어 오르는 용광로의 쇳물도 결국은 모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놀기를 탐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려함은 종신토록 아무런 진보가 없다.
결점이나 과실을 지닌 것은 두렵지 않으나,
자신의 결점을 알고도 회개하지 않음이 두려울 뿐이다.

훌륭한 역사공부를 했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아직도 수수께끼의 하나는 조선의 여인들이 가장 중요한 가슴을 열어놓은 사진 입니다.
어인 사연 인지가 대단히 궁금 합니다.
박 위원님의 초심!으로의 회귀?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싶습니다.
가끔은 누구라도 휴식의 시간이 필요함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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