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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뿌리의 세 종교 이야기⑱ 요하난 벤 자카이 (Johanan ben Zak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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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뿌리의 세 종교 이야기 요하난 벤 자카이 (Johanan ben Zakkai)

요약 : 1세기에 활동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현인(賢人).

얌니아에 아카데미와 권위 있는 랍비 기구를 설립했는데, 이 기구는 70년 성전이 파괴된 뒤 전통적인 유대교의 전승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든 탈무드교사들(구전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경우도 엄밀한 의미에서 전기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탈무드와 미드라시 자료(주석과 해석)는 주로 현인들의 가르침과 그들이 대표하는 견해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하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70년 이전에도 바리사이파의 주요대표자로서 사제와 사두가이파로 구성된 당국자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할 것과 구전전승을 표준으로 포함시킬 것, 전통적인 법령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여 해석할 것 등을 주장했고, 보수적인 소수 특권층이었던 사두가이파는 기록된 율법만을 권위 있는 표준으로 받아들였고, 더욱 문자적이고 고정적인 해석을 했다. 요하난의 학교는 유명했음이 틀림없으며,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입학허가를 얻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는 극단적인 행동까지도 하곤 했다.

   

요하난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로마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정책에 반대했다.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요하난은 70(68년일 가능성도 있음)에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로마군 진영으로 이송됨으로써 유대아 해안 근처 얌니아(야브네)에 아카데미를 세우도록 허락을 받아냈고, 이곳에서 좋아하던 많은 제자들과 합세했다. 그 가운데 엘리에제르 벤 히르카누스와 요슈아 벤 하나니야는 예루살렘에서 스승을 관에 넣어 몰래 빠져나가게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1세기말과 2세기초에 자기 세대를 이끈 교사들이 되었고, 다음 세대의 대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요하난의 가르침은, 그의 이름으로 된 몇 가지 안 되는 진술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2세기 동안 명료하게 다듬어진 여러 견해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말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자비 행위는 과거의 성전 제사의식에 못지않게 죄사함을 받는 데 유효하며, 창조 이래 우주의 핵심이다.

   

토라(하느님의 교훈 또는 율법) 연구는 인간 생애의 중심 목적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항구적인 형태이다. 한때 성전에 한정되었던 여러 의식과 규율은 '그 성소를 회상하는 역할을 하도록' 성전 바깥에서도 채용되어야 한다. 예루살렘이 성소이긴 하지만, 의식과 교훈에 대한 기본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는 권위 있는 학자에게 맡겨야 한다. 본래부터 급진적인 이러한 견해들은 랍비들의 표준적인 가르침과 유대교의 항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요하난은 얌니아에 주요 아카데미와 권위있는 랍비 기구를 세움으로써 기본 전통이 전승될 수 있는 여건을 확립했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상을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재해석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탈무드및 랍비 유대주의가 그 뼈대를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하난과 제자들이 몰두한 것은 율법(할라카)의 연구와 계승발전이었다.

   

또한 이들은 특히 성서 내용에 관한 설명과 해석인 성서주석(미드라시)과 관련해서 비율법적인 주제들(학가다)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 외에도 창조 문제와 메르카바(에제키엘1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전차) 환상에 관련된 신비주의 주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심지어 그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도 이러한 주제로 강론을 했다. 또한 성전 파괴 이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이전에는 헬레니즘(로마 세계의 통속적인 철학 논쟁 특유의 윤리)철학 문제가 제기되어 논쟁이 일어날 경우, 요하난은 회의를 소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하난은 설교를 통해 성서를 해석하면서 뛰어난 방법으로 상징적인 해석과 논리적인 해석을 조화시키곤 했다. 왜 재단을 세울 때 정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 쇠는 파괴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지만, 하느님의 제단은 평화를 전하기 위해 있기 때문이다. 왜 종이 되기를 자원(自願)하는 사람은 귀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며, 시나이 산에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에 구멍을 뚫으라. 이것이 요하난의 전형적인 주석방식이다.

   

그는 메시아 선포가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보아 이를 물리쳤지만, 마지막 병석에서 요하난이 했다고 전해지는 한 마디 말은 메시아에 대한 사색이 그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1세기의 모든 팔레스타인 유대인 현인들 가운데 요하난 벤 자카이만큼 당대와 그뒤 여러 세대의 학자들과 신앙지도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었다. 그는 탈무드문학사와 사상사에서 힐렐파 전승을 이어갔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힐렐의 가르침만 물려받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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