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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뿌리의 세 종교(이슬람교) 이야기⑮ 이슬람교 종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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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뿌리의 세 종교(이슬람교) 이야기이슬람교 종파들

이슬람교 종파들

1. 종파 분열의 역사

632년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이슬람 세계는 위기에 직면한다.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데다 후계자 선정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 후계구도는 피로 얼룩졌고, 그에 따른 갈등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도 여기서 출발한다.

수니파는 무함마드 이후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트만. 알리 이븐 아비의 4대 칼리프와 이후 칼리프들의 정통성을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시아파의 경우 그들 가운데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만을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한다.

칼리프의 자격요건도 수니파는 혈통이 아니어도 같은 부족인 쿠라이시족 출신이면 된다고 보는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견해차 속에서 알리 이븐 아비가 4대 칼리프로 집권할 무렵 아랍세계는 잦은 분쟁과 반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657년 시리아를 다스리던 무아위야가 반란을 일으켜 동서로 분리되었고, 하와리지파에 의해 알리가 암살된다. 결국 무아위야는 알리의 장남 하산을 격파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선출 임명직이던 칼리프 지위도 세습화시킨다.

 

2. 수니파

이슬람교에는 교리가 상반되는 200여 종파가 있는데, 주류는 수니파로서,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이다. 수니파는 무슬림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순나는 <코란> <하디스>. 예언자와 정통 칼리프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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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아파

분파란 뜻이다. 무슬림의 10~20%로 칼리프 자리를 살해당한 알리 가문에 되돌려 주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칼리프들의 뒤를 이은 우마이야 왕조(661~750). 아바스 왕조(750~1258)는 시아파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지도자. 인도자를 뜻하는 이맘에 대하여 수니파는 <코란>을 읽고 예배인도자 정도로 생각하나, 시아파는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로 <코란>의 신비를 밝혀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시켰다. 이란의 호메이니. 하네메이 같은 이들이 최고위급의 이맘들이다.

희생과 순교를 중시하는 시아파는 구세주 신앙도 있어, 알리 이후 12이맘의 시기가 지나고 마지막 12대 이맘이 873년 사라졌다고 믿는 열두 이맘파에서 메시아사상의 전형이 나타난다.

 

4. 카리즈(카와리즈)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25년째 되던 해에 칼리프 우스만이 살해당하자,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살해범의 체포에 주저하자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커스 총독 무아위야가 아랍의 씨족 전통에 따라 복수를 외치며 반기를 들어 무슬림끼리의 내란에 돌입했다. 이 제1차 내란 중에 무아위야의 평화협상 제의에 직면한 알리파는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이러한 분열에서 전열을 가다듬기 어려운 알리가 부득이 협상에 응하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를 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알리의 진영을 떠나니 이것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리즈파(탈퇴자)이다. 후대에 카리즈파의 주장은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요약하였다. 즉 마음을 달래는 것은 혀가 아니고 바로 행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카리즈파는 전투적인 청교도요 행동주의자여서 법을 그들의 손으로 집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지하드(jihad 성전)를 여섯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그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무슬림을 살해할 정도였다. 알리 자신도 이들에 의해서 661년에 살해당했다.

   

카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쉬의 자손만이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수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점은 독실성이어서 심지어 건강하고 총명한 흑인노예도 칼리프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가운데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리즈파는 우마위야조의 초기에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후에 무정부적인 그들의 태도 때문에 분파작용이 일어나 저절로 약화되었다.

이 파의 추종자는 오늘날까지 미미하게 존속하고 있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및 아라비아반도의 오만에 그 추종자를 볼 수 있다. 카리즈파의 맹신적인 청교도 정신만 아직까지 수니무슬림 속에 남아, 18세기에 이르러 아라비아반도에서 와하비(Wahhabi) 운동의 발생 동기가 되어 오늘날 사우디 왕가의 모태가 되었다.

   

와하비 운동과 사우디아라비아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석유대국 사우디아라비아는 1932년 탄생하였다. '사우드 가문의 아라비아' 라는 말처럼 처음 일어날 때도 군주정이고, 지금도 헌법도 의회도 없는 군주정이다. 이 나라의 기원은 1744, 지금 국왕의 조상인 무하마드 이븐 사우드가 와하비란 종교 개혁가와 함께 와하비 왕국을 세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와하비는 '무하마드 당시의 이슬람교로 돌아가자!!' 는 주장을 내걸고, 성자숭배를 반대하고, 오스만 제국 술탄의 종교적 권위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와하비의 주장은 아라비아의 최강자를 꿈꾸던 사우드 가문과 튀르크족의 지배를 받던 아랍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두 차례에 걸친 와하비 왕국을 탄생시켰으며, 1891년 와하비 왕국이 무너진 뒤에도 종교적 결속은 이어져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를 탄생시켰다.

 

요약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가 이끄는 조직으로 알카에다 이라크지부에서 출발해 시리아와 이라크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이슬람국가(Islami State, IS)'를 자처함. 인질 살해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장면을 인터넷에 공개해 선전책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들이 장악한 지역에 미군의 공습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라크 정부군 등과 교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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