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뿌리의 세 종교(이슬람교) 이야기⑬ 2.헤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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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뿌리의 세 종교(이슬람교) 이야기⑬ 2.헤지라
2.헤지라
헤지라(아랍어: هِجْرَة)는 무함마드가 박해 때문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슬람교의 전설에 의하면 622년 9월 20일의 일로서 메카를 출발한 날이 아니라 메디나에 도착한 날짜를 말한다.
'헤지라'라 함은 본래 혈연·지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것이 뒤에는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해서 메카에 있어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이것이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이슬람교 초기의 교도들에게 인식되어 뒤에 이슬람교 기원(紀元)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하로지룬). 이미 메디나 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디나 측으로서는 메카 측과는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 반대한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휘쿤'이라 하여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다. 반대 이유는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신도들의 6가지 서원
우리는 한분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을 경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적질하지 않는다.
우리는 간음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아살해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당한 일에 있어 예언자에게 불순종하지 않는다.
사라센제국의 출발
선지자 무함마드가 창조한 이슬람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제국. 7~8세기 당시 중국의 당 제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던 제국이었으며, 두 세력의 충돌은 탈라스 전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단순히 이슬람 제국이라고 하면 이슬람을 국교로 삼는 모든 제국들을 다 가리키는 말이 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이슬람 제국이라 하면 이슬람 초기 통일된 판도를 자랑하던 제국들, 즉 아바스 왕조 이후 사분오열되기 이전의 제국을 가리킨다. 아랍 제국이나 사라센 제국이라는 말도 널리 쓰인다. 사라센이란 사실 서방만의 표현인데,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Sinai-peninsula)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것이 사라센이다.
이슬람 제국의 팽창은 우마이야 왕조가 동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서로는 732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 궁재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한 푸아티에 전투까지 확장을 계속하였다. 당시 아비뇽과 리옹을 점령했다가 말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슬람 제국은 이후 오랫동안 분열된 상태에 놓였다가 튀르크 시대도 한참 지난 오스만 투르크 때가 되서야 다시 통일 제국의 형태를 띄게 된다. 이슬람 세계로서는 1000년 쯤 지난 뒷 시대로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로 이후 크게 쇠퇴한다.
전성기의 이슬람 제국의 부강함과 문화적, 문명적 수준은 실로 높은 수준으로 당대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세계 최고 수준을 이루었다고 할 만 하다.
아브라함의 종교를 원상회복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 자식인 이삭의 유산 상속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장자이자 합법적 상속자인 이스마엘에게 질투를 느껴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아브라함에게 강요했다. 수일간의 여행 끝에 타는듯한 사막 한 가운데에 버려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한 방울의 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갈은 물을 찾아 싸파와 마르와라는 두 언덕 사이를 7바퀴나 돌았으나 허사였다. 하지만 이때 하느님은 또 다른 기적의 은총을 내려주었다. 이스마엘의 발밑에서 잠잠이라는 샘이 솟아났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뒤 하갈과 아들의 생사가 궁금해 찾아와 보니 모자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며 메카에서 잘 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사막에 떨어진 운석을 운반해와 제단을 쌓고 이스마엘과 함께 예배소를 세워 감사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카바 신전이다.
이스마엘은 이집트 여인과 결혼해 12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137세 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신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라고 명령했을 때 주저없이 오직 신에게 복종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른 어떤 것 보다 중요시 한다. 무슬림은 하나님으로부터 번제의 희생물로 지목된 아들이 이스마엘이라고 믿는다. 그는 장자였고, 할례를 했으며, 약속의 합법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코란>의 성구는 다음과 같다.
“아들이 그와 함께 일할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아브라함)가 말하기를, 오, 내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제물로 바치는 꿈을 꾸었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가 말하기를, 오, 아버지, 명령하신대로 하시옵소서. 하느님의 뜻이라면 당신께서는 제가 인내하는 자들 중의 하나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한편 <구약성경>에서는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주인공이 이삭으로 등장한다. 번제의 대상이 ‘독자인 이삭’으로 표시되는데,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형 이스마엘은 계속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독자라고는 할 수 없다. 무슬림 학자들은 모리아 땅이, 이스마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메카에 잇는 마르와 동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런 부분이 유대교에서 왜곡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슬람 전통에서 가장 큰 축제일인 희생제는 바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려다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중재로 양을 대신 바친 사건에서 유래한다.
♣ 무함마드의 영면
무함마드는 631년 노구를 이끌고 메카를 순례했다. 부근의 아라파트 산에서 마지막 고별 연설을 하면서 이슬람의 승리를 세상에 공식 선포했다. 그는 또 “모든 무슬림은 형제지간이니 서로 도우라”고 당부했다. 이 여정을 ‘하즈’라 부른다. 이후 무슬림 가운데 성지 메카를 순례한 사람들 이름 앞에 ‘알 하즈’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632년 6월 8일 향년 62세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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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기독교 중심의 섭리에서 매우 중시하는 아브라함-이삭-야곱 노정이, 이슬람 쪽에서는 번제 중심이 이삭이 아니고 이스마일이라하니, 참으로 혼란스럽네요. 둘 중의 하나는 진실이 아닐텐데...
사실 기독교 중심으로만 세계사를 보기 때문에 이슬람은 별거 아니게 보였지만, 신도수 기준으로 보면 늦게 출범한 이슬람과 기독교는 거의 대등하다는 점도 하늘의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가 의문시 되기도 하고,
한편 20여년 내로 신도수가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니 그점도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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