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론23. [불교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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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불교의 행복론]
불교적 행복관의 단초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 동기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젊고, 지극히 행복 했었다. 전혀 근심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노인, 환자, 죽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멀리하고 혐오하였다. 그러나 문득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 또한 늙어 병들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와 같이 자신을 관찰했을 때, 나의 청춘의 교만함, 건강의 과시, 생명의 자랑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받고 태어난 이래 행복과 혈기로 가득찬 내 인생의 봄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던 것이다.” (增支部經典) 이러한 석가의 술회는 자신이 지금까지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한 것은 실은 무상하고도 허망한 것이며,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반대로 생로병사와 관련된 비참한 생활이었음을 말해 준다.
진정한 행복의 근원을 찾고자 출가한 석가는 기나긴 수행을 통해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람은 생사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없고, 세상 명예나 평판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없고, 근심도 없고, 분노도 없고, 오직 열반의 평안함 속에 거할 수 있으며 인간의 행복으로서 그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 요컨대 진정한 행복이란 ‘涅槃의 평안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석가가 깨달은 열반이란 어떠한 경지 인가? 열반이란 본래 타오르는 불길이 바람에 의해서 후욱 불어 꺼져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즉, 모든 번뇌가 멸해 떠나 다시 생기는 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한 그런 상태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아보면 온갖 종류의 고민과 괴로움과 슬픔 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를테면 생로병사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 갖고 싶은 것을 못가짐, 기타 심신에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 등 이른바 온갖 고통 때문에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동요해 마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들의 헛된 욕망, 즉, 탐진치(貪瞋痴) 등의 번뇌로 인하여 생긴 것 들이다. 사람은 헛된 욕망에 의해서 괴로워 한다. 요컨대 삶의 고통과 번뇌는 ‘마음의 평안함이 최고의 행복’(法句經)임을 깨닫고 있지 못한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반의 경지는 보통 말해지듯 단지 번뇌 적멸의 소극적인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魔王 魔人 때문에 부서지지도 않고’(智度論) 거짓 욕망에 좌우되지도 않는 ‘항상 자유인’으로서 자율적인 인격을 이룬 경지이다. 불교는 결코 현실도피의 염세적인 속세관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오직 피하고 버려야 하는 것은 거짓 욕망이며, 올바른 의욕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늘리고 키워나가야 한다. 이러한 자율적인 인격위에 행복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적까지도 사랑하는 자비는 원망하는 마음을 자신에게서 끊어버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무릇 이 세상에서 원망에 대해 원망으로 보답하는 한 원망은 그치질 않는다. 자기가 원망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원망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法句經)
석가는 또 세상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부모를 존경하고 봉양해라. 그리고 자비를 행하듯 부모를 모시면 이것이 진실의 보은이다.”고 말한다.
석가는 죽음에 임박하여 제자 아난다에게 “자기를 등불로 삼아 자기를 의지하게 하고, 법을 밝혀 법에 의지하게 하라. 방종하지 말고 정진하는 것이 좋으니라.”(長部 經典)고 가르쳤다. 깨달음을 통해 마음의 평안과 조화를 이룬 자기야말로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유약함을 인간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지혜의 힘을 통해 수행 초극 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 ‘인간 신뢰의 종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자기의 해탈과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 즉 자기의 완성과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를 하나로 실현한 석가모니 부처의 행동과 가르침은 현대에 있어서도 불교도의 행복관의 핵심이 되면서 동시에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깨달음의 말씀으로 늘 살아 있다고 할 것이다.
2. 행복에 이르는 지혜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삶은 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니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고통은 그를 따른다. 수레의 바퀴가 소를 따르듯. (法句經)
-무지에 굴복하지 마라. 쾌락이나 헛된 야망에 빠지지 마라.
명상 속에서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은 마침내 저 기쁨의 절정인
‘니르바나’에 이르게 된다. (法句經)
★ 니르바나[Nirvana][涅槃]
니르바나(Nirvana, 涅槃)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최고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니르바나에 대한 언급은 어렵고 조심스러워진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이미 이론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수행과 실천, 체험과 증득의 문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열반을 수행과 실천의 문제로만 치지 도외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목표에 대한 명확한 지식과 이해는 올바른 수행과 실천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니르바나의 어원적 의미는 불길이 꺼진 상태(吹滅)인데, 열반은 일반적으로 죽음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죽음을 그렇게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지만, 사상적으로는 몸과 정신이 모두 아주 없어진(灰身滅智) 무여(無餘)열반을 정신적으로는 해탈을 성취했지만 아직 육신은 남아있는 유여(有餘)열반보다 더 수승한 열반으로 취급하는 소승불교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열반은 죽음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현생에서의 열반(現法涅槃)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셨던 점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열반을 가리켜 절대안온, 최고 락(樂), 안전, 섬, 피난처, 평화, 심지어는 불사(不死)라고까지 하셨다. 비록 열반이 어원적으로 불길이 꺼진상태의 의미임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생명 또는 삶의 불길이 꺼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구들아, 모든 것은 불타고 있느니라. 불타고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비구들아, 눈이 불타고 있고, 대상(色)이 불타고 있고, 안식(眼識)이 불타고 있다. 그것은 탐욕과 증오와 무지의 불로 타고 있느니라. 또한 그것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품과 한탄과 고통과 비탄과 절망으로 불타고 있느니라고 하신 가르침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 불길 은 탐욕과 증오와 무지, 즉 3독심의 불길이며 모든 고통과 번뇌의 불길인 것이다. 따라서 열반은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 탐진치의 불길,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바람 잔 숲에 새들이 날고 물결 고요한 호수 위에 고기들이 뛰노는 것처럼, 탐진치와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짐으로써 우리의 순수한 본래적 생명은 비로소 새처럼 자유롭게 약동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은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의 순수한 본래적 생명이 연기도 그을음도 없이 완전 연소되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석존이 설한 거문고의 비유가 시사하듯, 열반의 삶이란 악기의 침묵이 아니라 조율이 잘 된 악기에서 울려나는, 장단이 잘 맞는 아름다운 음악의 연주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니르바나는 결코 빛 바랜 삶이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와 평정과 생명으로 충만한 푸르른 삶이다. 불교가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인 만큼,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은 그 예술 자체임과 동시에 그 예술이 빚어낸 지혜와 자비의 삶 또는 자유˙평정˙생명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반은 삶의 소멸이 아닌, 정화되고 승화된 삶의 질에 대한 언명인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이 집착의 집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택하나니
외롭고 적적한 곳에서 그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라.
소유욕과 헛된 야망, 그리고 그대 마음을 덮고 있는 이 무지와 갈등으로부터 벗어나서.
-미움 속에 살면서 미워하지 않음이여! 내 삶은 더없이 행복하여라.
사람들 서로서로 미워하는 그 속에서 나만이라도 나 혼자 만이라도
미워하지 말고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가자.
고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뇌하지 않으매 여기 크나큰 즐거움이 솟는다.
고뇌하는 사람들 속에서 고뇌하지 말고 살아가자! (法句經)
-어리석은 자와 함께 가지 마라! 거기 원치 않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원수와 함께 사는것 만큼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거기 기쁨은 넘쳐 강물로 흐른다.
그 영혼이 새벽처럼 깨어있는 이, 인내심이 강하고 고개 숙일줄 아는 이,
이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의 뒤를 따르라. 저 별들의 뒤를 따르는 달처럼.
-사랑으로 분노를 다스려라. 선으로 악을 다스려라.
자선으로 탐욕을 다스려라. 그리고 진실을 통해서 거짓을 다스려라.
-행복이라느니 불행이라느니 하는 것을 불이라고 한다. 하지만 앎이 지극히 순수하여 일체의 헤아림을 벗어나며 지혜가 허공과 같아서 걸림이 없는 그것이 바로 不二의 법문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앎은 본질적으로 어리석음과 다르다. 어리석음이란 정작 측량할 수 없는 것, 思量의 도를 초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는 그것이 바로 不二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불이의 법문에 들어가는 도리는 실로 문자도 없고 말도 없으며 마음의 움직임도 없는 무생법이다. (維摩經)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碧巖錄)
-인간의 모든 욕망은 덧없고 허무하며 물거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으며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華嚴經)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 이른 새벽에 초인종이 울렸다. 집주인은 문을 열었다. 거기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난 幸福의 신입니다. 당신에게 행복을 주려고 찾아 왔습니다.”
집주인은 반갑게 그녀를 맞아 들였다.
그런데 잠시 후 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거기 추녀가 피고름을 흘리며 서 있었다.
집주인은 말했다. “당장 꺼져! 이 미친년이 아침부터 재수 없게 남의 집 문전에서 기웃거려...” 그러자 추녀가 말했다.
“ 난 당신에게 不幸을 주려고 온 신입니다. 아까 당신 집에 들어간 幸福의 신은 나의 언니입니다. 우리는 늘 같이 다닙니다. 당신이 만일 나를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의 언니도 당신 집을 떠날 것입니다. 자, 나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언니를 떠나게 하든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 하십시오.” (阿含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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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글을 모름에도 하는 말 속에는 詩情이 담겨 있으니,
시인의 참 멋을 깨달음이로다.
參禪한 적이 없으나 하는 말에는 禪意가 담겨 있으니
禪宗교리의 깊은 철학을 깨달음이로다.
-禪은 不立文字요, 敎外別傳이다. 문자에 구속되지 않는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불교>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
교외별전[敎外別傳]
[명사]<불교>선종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는 법. ≒교외3(敎外) .
정해관님의 댓글
지금까지 [동양철학 산책]에 이어 [행복어 시리즈]를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몇번 언급했던 바와 같이 요즈음의 카페나 홈피에서 이런 류의 글은 상당한 인내심을 갖지 아니하면
읽고 가기가 대단히 힘드는 법임을 잘 압니다.
좀 색다른 사랑방임을 '과시' 하고픈 마음에 욕심이 앞선 것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호소하고 바라건대 [우리광장]란을 새롭게 이끌어 주실 자매형제 여러분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고정화된 선입견을 떠나 표현하고픈 내용을 어디라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직에 계시거나 관심이 있으신 분의 '교육론' 공직자 분들의 '신학' 또는 '말씀론'이 전개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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