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살신순절(殺身殉節)· 망신국활(亡身國活)의 표본
컨텐츠 정보
- 0댓글
-
본문
성웅 이순신의 죽음을 재조명
이순신은 살신순절(殺身殉節)·망신국활(亡身國活)의 표본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조·명 연합함대와 일본함대의 마지막 해상격돌인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숨졌다. 이 전장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이 이순신보다 먼저 전사했으며, 명나라 수군 사령관이던 진린(陣璘)의 대장선도 적에게 포위되어 이순신 함대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되었으며, 이순신의 예하 장수도 10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최대의 격전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피아 함정세력을 보면, 일본함대는 300척이 넘었으나, 명·조 연합함대는 그 절반인 150척(명나라 함선 63척 포함)에도 못 미치는 열세한 형편이었다. 이날 새벽의 4시간에 걸친 대해전에서 명나라 함대는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지 않았지만, 시종 이순신이 통할 지휘하여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광석화의 날센 공격으로 적함 250여 척을 단숨에 격파함으로써 전장의 주도권을 선취한 다음 50여 척의 도주하는 적을 편범불반(片帆不返)의 결의로 추격하던 중 지근거리에서 적 저격수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이 싸움에서 명나라 함대는 다수의 함정을 잃었으나, 이순신 함대는 명나라수군 사령관에게 빌려준 판옥선 1척외는 전혀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이순신이 해상에서 순직한 직후에 일어난 두 가지 기억할만한 사건의 일화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하나는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본인의 분부였다. 그는 부대의 전투사기 저하를 우려한 나머지 자기의 죽음을 덮어둔 채 계속 독전에 임하여 적을 무찌르도록 옆에 있던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사건은 이순신의 죽음을 전해들은 명나라 수군 사령관 진린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 배 위에서 3번이나 넘어지면서 「죽은 뒤에도 능히 나를 구원해 주었구려, 이제는 같이 일할 이가 없구만」하고 대성통곡하였던 것이다.
충무공 전서에 보면, 그 부록에 이순신의 공로를 찬양하는 역대 국왕과 문무백관들이 올린 수많은 글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감격적인 두 편의 글은 퇴우정(退憂亭), 박승종(朴承宗)의 충민사기(忠愍祠記)와 숙종 임금의 현충사 제문이라고 하겠다.
첫 번째 글 구절은 그가 죽을 시기에 죽을 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리어 살았다는 가슴 뭉클한 뜻을 담고 있다. 「아! 공으로 하여금 만일 그 날에 죽지 않게 했더라면, 일개 공신에 불과했을 것인데 이제 마침내 그 충성을 현양하고 절개를 표칭함이 천지에 찬란하니, 비록 죽었어도 오히려 살았도다....... 그러나 구차스레 제 목숨 보존한 자들은 저 나뭇잎 위에 붙은 먼지와 다를 것이 없어서, 이것으로서 저것에 비긴다면 하늘의 은총이 또한 풍족하다고 할 것이다.」
이는 이순신이 평소에 지녔던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확고부동한 사생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전혀 가식이나 각색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비겁하고도 치욕스러운 삶을 마감한 원균에게 던져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두 번째의 것은 역대 조선왕 중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가장 옳게 평가한 숙종의 제문인데, 이순신을 죽이려고 온갖 계략을 다 꾸민 선조와는 사람을 보는 눈이 판이하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옛부터 있지만, 제 몸 죽이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殺身殉節 古有比言, 身亡國活始見斯人)」
이순신과 더불어 마지막 해상결전에 동참했던 진린 도독은 선조 임금에게 이순신을 예찬하여 이렇게 아뢴 바 있다.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요, 하늘과 해를 다시 손본 공이로다(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이와 관련하여 이순신의 이름풀이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순신(舜臣)은 순(舜)나라 임금의 신하(臣)인데, 순 임금이 여러 신하들 가운데 우(禹)를 지적하여 「오직 여(汝)라야 화평(諧)을 이루리라」고 했다는 서경(書經)의 기록에 따라 이순신의 이름 순신(舜臣)과 호 여해(汝諧)를 지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예지라고 하겠다.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말기)에 보면, 7년전쟁중 이순신의 해전활동 무대였던 전라도의 민중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이순신의 순국정신은 물론 수군지휘관으로서 사람됨을 원균과 대조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 전임 통제사 원균은 탐학 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므로 크게 군심을 잃었다. 그리하여 장병들이 모두 그를 이반 했으므로 드디어 정유재란때 3도 수군을 전멸시켰다.......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지자 호남의 전 도민은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슬피 울었다. 그의 애국심과 몸을 잊은 정의의 죽음은 옛날의 양장(良將)일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특히 이 글은 선조실록의 편찬 책임자였던 기자현(奇自현)이란 자가 집필한 것인데, 그는 북인으로서 서인과 더불어 이순신을 극력 무함한 원균의 비호세력이었던 자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순신의 공직생활을 되새겨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한 파노라마의 대장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다음 미관말직인 종9품의 권관(權管)으로부터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3도 수군통제사 직을 맡은 54세에 순직할 때까지의 22년간은 형극의 발자취 그 자체였다.
특히 그가 첫 장관급(將官級) 직위인 함경도 발포의 만호(萬戶)로 재직할 때까지의 6년간 그리고 그후 둔전관(屯田官)과 고을 현감(縣監) 및 군수(郡守)직을 맡은 8년간을 거쳐 전라좌수사와 3도 수군통제사로서 7년간의 조·일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2번이나 파직·백의종군을 당하였으며 2회에 걸쳐 육전과 해전에서 전상을 입은 것은 물론, 때로는 몇계급씩 강등되어 하위직에 보직되기도 했지만, 이를 감내해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공무상 부조리를 저지르거나 상·하급자에게 부당하고 비겁한 처사를 한 적이 없다. 그의 강인한 성품과 올곧은 공직생활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조·일전쟁 1년여 전에 선조는 우여곡절 끝에 그를 전쟁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파격적인 상위직급인 전라좌수사로 영전시키게 되었다.
부임하자마자 그는 철저한 전쟁준비를 했고 개전과 동시에 중과부적의 불리한 전술상황하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결사항쟁·용전 분투하여 국가위기를 구하였다. 특히 노량해전에서 그가 보인 결연한 죽음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며 스스로의 결단이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거미 같은 착취나 해악의 삶도 아니고, 개미와 같은 이기와 탐욕의 삶도 아니며, 꿀벌과 같은 이타(利他)와 희생의 삶으로서 결정적 시기에 삶을 거룩하게 마감한 리더십의 정도요 귀감이었다.
이는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진충보국(盡忠報國)의 큰 획을 걷고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살신순절과 망신국활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의인(義人)인 척 하는 많은 악인(惡人)이 있었으나, 이순신처럼 악인으로 누명을 쓰고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한 몸바쳐 죽음을 무릅쓰고 일편단심으로 최선을 다한 의인은 많지 않은 것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몸이 몹시 불편하여 병을 앓은 적이 135회나 기록되어 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오매불망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그는 인접해역의 함대사령관 그리고 예하 함대사령관이었던 원균의 계속적인 도전과 비방, 불평·불만 그리고 모략중상으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음은 무려 84회나 자기의 일기장에서 그 괴로운 심경을 피력하고 있다. 그 내용은 하나도 과장된 것이 아니고 사실을 완곡하게 함축성 있게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순신은 일생을 통해서 우국(憂國)과 구국(救國)으로 일관된 생활로 일관했으며 순국(殉國)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자나 깨나 나라 걱정 속에서 나날을 보냈으니, 그가 남긴 시와 글들이 모두 그것을 증거하고도 남는다. 그가 남긴 우국의 시 한 수를 되씹어 보기로 한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가물가물 잠 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 새들도 슬피 우노라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지만
바로 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