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14. 성호학파의 탈주자학적 경학과 제도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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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의 脫朱子學的 經學과 制度改革論
인륜의 완성자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儒學의 目標라고 한다면, 經典공부 즉 ‘經學’을 통하여 성인의 언행을 익히는 것은 유학의 方法에 해당한다. 漢 대부터 당대에 걸쳐 3경. 6경 또는 13경이 확립된 이후 宋代의 朱子學이나 조선의 性理學에 이르기 까지 유학자들은 경전에 대한 재해석을 유학의 경신을 위한 중요한 방안으로 삼아 왔다. 이 점을 감안 하자면 [북학파]의 경우는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들은 단편적인 글들을 제외하면 경학 관련 연구 업적을 남기고 있지 않다.
반면 [성호학파]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이미 이익(1681~1763)부터 사서와 삼경을 대상으로 <疾書>라는 이름의 경학 관련 저작을 다수 집필하여 경학 중심의 학문 전통을 확립하였다. 그들은 천주교 관련 사건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좌파의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자면 대부분이 적지 않은 경학 저술을 남겨 놓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의 집대성자이자 성호학파의 최후 거장 답게 거의 모든 경전에 주석서를 비롯하여 방대한 규모의 경학 저작을 남겨 놓고 있다. 이는 성호학파, 그중에서도 특히 정약용의 새로운 학술. 사상이 새로운 경학을 매개로 하였음을 의미 한다. 이때 새로운 경학이란 당시까지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지배해 왔던 주자학적 경학과 대비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성호학파 학자들은 이익의 宗旨 가운데 하나로 ‘자득’을 선양해 왔는데, 이때의 자득이란 선유의 주석에 얽매이지 않는 독창적인 경전해석을 의미하였다. 성호학파는 이익의 자득 정신을 바탕으로 점차 주자학적 경학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 했으며, 정약용에 이르러 큰 성취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당시에 전해진 중국과 조선은 물론 일본의 경학 자료까지 망라하여 열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경학을 구축하였다. 그것은 특히 청대 고증학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이룩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규모의 방대함은 당시 어느 누구의 경학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경학이 그의 학문의 본령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서학의 과학. 기술 뿐만아니라 기독교조차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그의 다양한 사상 편력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정약용의 탈주자학적 경학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첫째로 이기론의 변화이다. 이기론은 주자학적 경학에서 경전의 통일적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최고 수준의 추상 이론이었다. 정약용은 <맹자요의>. <중용강의보> 등에서 주자학의 이기론적 구도를 해체하고 새로운 이기론을 구축 하였다. 그의 새로운 이기론은 ‘이’의 실재성과 운동성을 부정하고, ‘기’에 대한 ‘이’의 주재성을 부정하며, 나아가 ‘이’가 선험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을 부정한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불변의 도덕적 원리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嗜好처럼 선을 향하는 대체적인 경향성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이’는 더 이상 ‘기’에 앞서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며, 유일한 실체인 ‘기’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기’의 운동 이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전락 한다. 이렇게 되면 종래의 성리학에서 ‘이’에 부여되던 ‘우주 만물의 대표’, 즉 태극의 지위는 박탈되고, ‘기’가 그 지위를 대신한다. 그에 따를 때 우주 만물은 원초적 상태의 ‘기’에 해당하는 태극이 스스로 분화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경세론 또는 포괄적 의미의 제도개혁론 이다.
그의 제도개혁론을 대표하는 저작으로는 보통 1표 2서로 칭하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있다. 이것들은 각각 방대한 분량의 저작으로 순서대로 국가제도개혁론. 지방행정개혁론. 형옥제도개혁론을 담고 있다. 글의 내용은 조목마다 여러 경전이나 선유들의 저작에서 관련 문장을 골라 인용하고 저자 본인의 견해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점을 놓고 볼때 1표 2서는 각각 독립된 저작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정약용은 <상서고훈>,<춘추고징>등의 경학 저작이나 <전론>, <탕론> 등의 단편에도 제도개혁론 관련 언급을 많이 남기고 있다.
내용의 측면에서 정약용의 제도개혁론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데, 가장 많이 주목을 받는 것은 ‘토지개혁론’이다. 토지가 당시의 기본 생산수단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가 38세에 지은 <田論>의 閭田制가 갖는 혁신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여전제는 30가구 정도로 구성되는 ‘閭’를 기본 단위로 삼아 그 안에서 여민의 토지 공유, 여장 지휘하의 공동노동, 작업량에 따른 분배를 골간으로 하는 토지제도이다. 이 제도는 일종의 협동농장제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農者受田의 원칙을 극단적으로 적용한 에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이 여전제를 고수하지는 못했다.
그는 <상서>와 <주례>에 나타나는 井田制를 연구하여 그것이 토지문제와 조세문제 등에서 이상적인 제도 임을 확인하고 유배지에서 56세에 지은 <경세유표>의 ‘田制’항에서 이를 자신의 토지제도론으로 삼았다. 그는 ‘전론’에서 정전제를 ‘실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언급했다가 <경세유표>에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입장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정전제를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언급해 온 유교 경전의 권위가 암암리에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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