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의 송별시와 산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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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의 송별시와 산수시
1. 왕유 (중국, 당 [唐] 예술가)
Wang Wei. (699~759)
중국 산시 성[山西省] 치 현[祁縣]
중국 문화사의 황금기에 활동한 유명한 예술가·문인.
자는 마힐(摩詰). 시·음악·그림으로 표현되는 인문 교육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세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동기창(董基昌)은 그의 화론서에서 왕유를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규정했다. 남종화는 문인 취향의 그림으로서, 피상적인 묘사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중에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왕유의 모습을 탐지해내기는 어렵다. 왕유는 당대(唐代 : 618~907)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이내 강등되어 산둥 성[山東省]의 하찮은 직책에 임용되었다가, 734년에 수도로 소환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에 올랐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반란군에 사로잡혀 반란군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왕유는 억지 벼슬을 받았다. 758년 관군이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을 때, 왕유는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시를 썼고, 또 고위 관리인 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중난 산[終南山]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왕유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은 대부분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왕유의 예술은 당시의 기록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그림 사본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가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채택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나, 산수화를 발달시킨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생존시에 설경산수화로 유명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망천도 輞川圖〉라는 화권(畵卷)이다. 이 그림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후에 제작된 많은 모사품으로 대강의 구도는 보존되었다. 기록상 그의 작품에서 발묵(潑墨) 기법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것을 함께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세에 성인에 버금가는 지위까지 올라간 것은 그가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명시 선집에 그의 작품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이백(李白 : 701~762)·두보(杜甫 : 712~770) 등의 유명한 당대 시인들과 함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시인으로 손꼽힌다.
2.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 - 왕유(王維)
[안서로 가는 원이를 보내다]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 위성에 아침 비 내려 먼지를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 객사는 푸르러 버들빛 새로워라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쭉 한잔 마시게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 없으리니.
이 시는 <악부 시집>에 "위성곡(渭城曲)" 또는 "양관곡(陽關曲)" 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당나라 때 송별(送別)의 노래로 널리 애창되었고, 세 번 되풀이하여 부르기 때문에 '양관 삼첩(陽關三疊)'이라 했다.
'원이(친구)를 안서 땅에 보내며'라는 뜻을 지닌 이 시는 전반 2행의 서경과 후반 2행의 서정이 멋지게 짜 맞춰진 서정시이다.
시인은 1-2행에 비가 내려 흙먼지가 가라앉고 푸른 버들잎이 산뜻하게 빛나는 풍경을 먼저 펼쳐 보임으로써, 친구와의 이별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준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길 떠나는 이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면서 송별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비가 내려 산뜻해진 버들잎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별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
고, 친구의 장도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태도를 취한다.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는 왕유의 시와 그림을 두고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는데, 위의 시에서도 이러한 회화적인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왕유의 시가 이처럼 경치의 제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서경을 확대하여 자신의 내면을 제시한다. 예컨대, 위의 행에서 친구에게 술잔을 건네 이별의 아쉬움을 말없이 드러낸 다음, 4행에서 양관 땅을 나가면서 만날 수 없게 되는 친구의 사정을 이해해 준다. 왕유 시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 관조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의 순리를 믿고 그것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삶의 자연스러운 섭리를 지나치게 화려한 표현보다는 소박하고 관조적인 어조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시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선경 후정(先景後情)'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눈으로 관찰한 경치를 객관적으로 제시한 다음, 그러한 풍경을 가슴 속에 받아 들인 시인의 내면이 주관적으로 묘사된다. '선경'과 '후정'은 이처럼 시의 중요한 대립쌍에
놓이면서 대구법(對句法)을 형성한다. 객관과 주관의 조화를 꾀한 중용의 정신이 선경 후정의 원리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3. 過香積寺 과향적사
不知香積寺 부지향적사
數里入雲峯 수리입운봉
古木無人逕 고목무인경
深山何處鐘 심산하처종
泉聲咽危石 천성열위석
日色冷靑松 일색랭청송
薄暮空潭曲 박모공담곡
安禪霽龍 안선제독룡
알지도 못하고 향적사 찾아가다
구름 깊은 곳에 들었네
고목 속으로 길은 사라졌는데
어디선가 종소리 들려 오네
개울물은 괴이한 돌부리에 울리고
햇빛은 소나무에 차갑게 빛나고 있네
해질녘 고요한 연못가에 앉아
禪定에 들어 번뇌를 잠재우리
*송나라 소동파(蘇東坡)는 왕유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왕마힐의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詩中有畵-시중유화), 그의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畵中有詩-화중유시)”
왕유의 〈향적사를 찾아서〉는 소동파의 시평처럼 깊은 산속 의 고사(古寺)의 경치를 읊은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놓은 듯하다. 그림 같은 시이다.
*중국 서안 ㅡ 향적사 (香積寺)
당나라 때인 706년에 창건된 중국 정토종의 본산인 사찰로,
시인인 왕유(王維:701∼761년)의 오언율시 과향적사(過香積寺)로 유명한 곳.
높이 33m인 벽돌탑인 선도고탑(善導古塔) 등이 있고,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상이 있는 대웅보전이 건축되어 있다.
서안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17㎞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위성삼첩(渭城三疊)'은
칠언절구인 왕유의 '송원이사안서'를 이르는 말로서,
'양관삼첩(陽關三疊)' 또는 '위성지곡(渭城之曲)'이라 일컫기도 한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정지상의 '송인'을 왕유의 작품에 견주어 '해동(海東)의 위성삼첩(渭城三疊)'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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