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史右三>7. 불우했으나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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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史右三>7. 불우했으나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
<사기>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걸쳐 살았던 서한시대의 사관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이다. 멀게는 전설시대의 三皇五帝로부터 가깝게는 사마천 당대의 황제 무제에 이르기까지 약 3천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방대한 역사책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대하는 고사성어나 명언들 중에는 <사기>에서 나오는 것이 적지 않다.
‘사면초가’‘토사구팽’‘불명불비’‘관포지교 ’‘문경지교’‘곡학아세’‘배수지진’‘분서갱유’‘약법삼장’‘완벽’‘용안’‘원교근공’‘주지육림’...귀나 눈에 익은것만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아도 이 정도다. <사기>는 인간의 삶과 인간관계를 이러한 성어와 명언으로 압축시켜 언어와 문장을 한 차원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사기>의 문장은 힘이 넘치면서도 우아하고 깊이가 있다. 인물 묘사는 그때 그 사람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듯 하다. <사기> 속의 인물들은 제왕에서 유협까지, 성인에서 모사까지, 풍운의 영웅에서 강호의 방랑자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착한 자의 어리석은 행동이 잇는가하면, 악한 자의 공적도 있다. 독자들은 이들의 행적을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 제도와 문물의 차이를 뛰어넘어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기>는 살아있는 시대의식을 불어넣는 훌륭한 ‘인류의 백과전서’인 것이다.
사마천은 수천년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시.공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며, 그것을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펼쳤던 행적을 통해 실감나게 뒷받침 했다. 이렇게 해서 제시된 ‘대립-통일-혼란-안정의 반복’이라는 역사법칙은 <사기>가 갖는 독특한 사관으로 자리 잡았고,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사마천은 한나라 조정에서 태사령이란 벼슬에 있던 사마담(司馬談, 기원전?~110)의 아들로,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 기원전 91년 무렵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활약한 시대는 한나라의 전성기였던 무제 때였다. 어려서부터 고전을 공부했고, 20세에 무제를 옆에서 보좌하며 견문을 높이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35세 되던 기원전 11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이 되어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음은 물론, 아버지의 사상과 관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기>의 끝부분에 딸린 사마천 자신의 서문인 <태사공자서>를 보면, 사상계를 주도한 6대 학파를 논평한 아버지 사마담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사마담은 각 학파의 기본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한 다음 냉정한 자세로 각 학파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있다. 장점이 잇다고 전적으로 찬성하지도 않았으며, 단점이 있다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사마천 역시 절대적 가치관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견해로 인물과 사건을 관찰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의 비평 태도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젊어서부터 사마천은 전국을 답사했고, 이 경험은 <사기>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이 자살한 멱라수를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한신. 소하 등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의 고향을 찾아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과거를 채집했다. 현장답사와 문헌기록을 변증법적으로 소화해 낸 <사기>의 실증정신은 오늘날 역사가들이 본받아야할 큰 장점이다.
태사령에 임명되고 10년째 되던 기원전 99년, 뜻밖의 사건으로 사마천의 인생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른바 ‘이릉 변호사건’이 그것이다. 이때 사마천은 잇는 힘을 다해 이릉을 변호했는데, 이것이 무제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었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 입을 모아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비겁한 행태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자 사태는 사마천에게 더욱 나쁘게 흘렀다. 사마천은 사형판결을 받게 되었는데, 궁형(宮刑-남자의 거세)을 자청하여 석방되었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치욕적인 형벌을 감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고백한다.
“모진 욕을 보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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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님의 댓글
사마천 같이 치욕적인 형벌을 감수할 사람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같이 뚜렷한 사관과 역사를 기술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통일가의 역사는 누가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 답답하다.
몇년전이다.
참어머님께서 "선정중학교"에 재학하실 때의 소중한 사진자료를 입수했다.
우리의 "역사편찬위원회" 빌려 주었다.
약 한 달 후 돌려 받았다.
나는 벌어진 입이 다물려지지 않았다.
사진에 가위질을 한 흔적이 뚜렷이 있었다.
1954년의 자료를 가위질해서 잘라 내는 순간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는 상실된다.
원본에 가위를 대다니......
역사적인 자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그 기초도 모르는 사람들이
"역사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기술의 중책을 맡긴, 사람도 있다.
몇년전이다.
희귀한 자료를 일본에서 구해서 국내로 가져왔다.
중책을 맡고 있는 모 선배가 복사하겠다고 빌려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빌려주었다.
몇 달후 하는 이야기...... 잊어버렸다......
아무 대책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이 말한다. 미안해 하는 기색이 안보인다.
세계적 희귀자료인, 세계 최초의 활자인쇄본인 "직지심경"이 프랑스에 있었다.
한국에서 돌려달라고 할 때 가잘 강력히 반대한 사람은 그 책을 관리하던 평범한 사서였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껴안고 펑펑 울면서 돌려 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한국에는, 그리고, 우리 교회에는 이런 사서가, 이런 사가가 없는가.....
뚜렷한 사관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과 참부모님과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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