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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11. 지눌의 선교일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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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2. 知訥(지눌)의 선교일치 사상

지눌(1158~1210)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승려이자 불교학자로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평생 나라 밖으로 나간 적은 없었으나, 사실상 모든 분야의 동아시아 불교를 통괄하고 그에 관한 광범위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선불교 수련단체인 수선사의 토대를 수립하기 위하여 평생을 진력하였다. 그가 제시한 종합적 불교수행 방법은 불교가 억압 받던 조선 왕조 초에 한국 불교의 수행 규범으로 채택되었다.

지눌사상의 골자는 물론 대승불교의 전통에 속한다. 그는 무지와 깨달음, 생사와 열반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는 대승의 믿음을 되새기면서 자신이 곧 부처라는 당연한 믿음을 일반 중생들도 지녀야 함을 역설하였다. 선 수련방법에 대해서는 ‘頓悟漸修’(돈오점수)야 말로 見性成佛의 요체라고 주장했으면서도, 지눌은 대중 각자의 능력, 즉 根機에 따라 3가지 선불교 수행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 혜능의 가르침 대로 三學을 겸수하는 정혜쌍수문(定慧雙修門)

둘째, 李通玄이 이해하는 화엄의 교리와 관법을 실천하는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셋째, 대해종고의 看話禪, 곧 경절문(徑截門)이다.

이러한 지눌의 종합적 수행방식 속에서 한국불교의 역사를 관통하는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 불교가 가장 격조 있게 피었던 시절에 완성된 사상적 종합 현상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지눌이 활동하던 12세기 후반에 불교는 지성계의 주요 세력이자 국가의 이념적 기반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려 왕실은 왕세자가 불문에 입문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불교에 우호적 이었다. 당시에는 선종과 교종 두 종파가 고려 불교계를 양분하고 있었다. 지눌의 선배이자 문종의 4째 아들인 의천(1055~1101)은 선종 승려들을 천태종에 흡수시키는 방법으로 두 종파를 통합하려고 하였다. 한편 불교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사원은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불교는 경제적으로 번성을 누렸으나, 그 이면에는 타락의 암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 왕조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점에서 지눌은 교종과 선종의 분열과 승가의 도덕적 붕괴라는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하였다. 그는 교종과 선종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독특한 불교 수행방식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교종 가운데 가장 번성을 누리던 화엄종의 사변적 형이상학을 선종의 체험에 연결 시켰다. 이렇게 선과 교의 그 나름의 독특한 통합을 통하여 한국불교 사상에 특별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후에 한국의 불교도들이 지눌이 제시한 이 방법을 따랐다.

지눌은 고려수도 개경 서쪽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 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려서부터 병약한 것을 늘 걱정하여 자식의 병을 치유해 주면 불가에 입문시키겠다고 맹세 하였다. 그러자 지눌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맹세한 대로 지눌은 9세에 중국에서 직수입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에 입문하였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선사나 유명한 스승들로부터 공식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의 체험과 일치하는 경전과 대가의 주석서, 고승에 관한 기록물 등 자기의 목적에 부합하는 지침을 발견하면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학을 수용하겠다는 포용적인 태도와 독자적인 학습에서 비롯된 포괄적인 태도로 인해, 그는 도움이 되는 경전이나 주석서의 어떠한 가르침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24세 때인 1182년에 선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수도에 머물면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세속의 풍토에 환멸을 느끼고, 정혜 계발에 헌신하는 은둔결사의 의도를 천명하였다. 이후 지눌의 개인적 수행의 특이성은 ‘보조선’이라는 한국불교의 뚜렷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그의 깨달음에 이르는 불교적 접근방법을 요약해 보면, 3가지 깨달음의 층으로 분석될 수 있다.

첫째는 최초의 지적 解悟로서, 이 단계에서는 자기가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지적 깨달음은 수행자를 일시적으로 불도에 귀의하게 만든다.

둘째는 漸修의 단계이다. 왜냐하면 첫째 단계의 지적 해오나 올바른 믿음의 단계를 거쳐 과거의 습기를 끊임없이 씻어 내어야 하고 건전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단계에서는 점수가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지눌은 1201년 입적하였는데, 8일 동안 몸에 병의 징후가 있었지만, 제자들과 함께 평소와 마찬가지로 문답하며 토론하다가 주장자로 법상을 두세 번 치고,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희종은 그를 ‘佛日普照國師’라고 추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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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정해관님의 댓글

방법을 알고보면, '누워서 떡 먹기'에다 '식은 죽 먹기' 랍니다.
요즘처럼 편리한 정보시대에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는 기술'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 홈에 자주 들리시면, 그 정보의 바다 헤엄치는 기술은 '낫녿고 기역자 익히기'보다 더 쉬울 수가 있고요.

하여튼 이런곳에서는 좀 따분한 (거개가 그림도 나오고, 음악도 있고, 글은 비교적 간단해야 이곳에서는 환영) 내용을 인내심을 가지시고 읽어 주시고, 거기다 토 까지 고맙게 올려주시는 분은, 단 두분이신데, 40계단 위의 높은 교회에 시무하시는 '대감-도사님'과 신광면의 '열혈심정의 기관차님'이십니다. 감사 합니다.

이무환님의 댓글

지눌의 선교 일치사상!!과연 놀랍고 대단하신 영구서적내용입니다 논문을써도 이렇게 상세하게는 어려울테데
박사학위를 받을정도로 정성의 행각 감탄의 연발 감사 합장 축원 아주,,,

정해관님의 댓글

지눌의 사상의 [돈오점수]와 [정혜쌍수]

◇ 지눌 '돈오점수'…성철 '돈오돈수' 논쟁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논쟁은 1980년대 초에 당시 조계종 종정으로 종단 안팎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성철(性澈) 스님이 돈오돈수의 입장에서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본격화됐다.

돈오점수는 문득 깨달은 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고, 돈오돈수는 한 번의 깨달음으로 수행이 완성된다는 것.

성철 스님은 1960년대부터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해 왔지만, 이 무렵 그의 저서인 ‘선문정로(禪門正路)’ 서문에서 지눌의 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모두 지해종도(知解宗徒·깨달음을 체득이 아닌 지혜로 이해하는 무리)라고 비난하며 선문(禪門)에서 이들의 폐해가 커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책을 저술했다고 한 것이다.

종정이 이 종단의 종조(宗祖)로 받들어져 온 지눌의 핵심사상을 비판했으니 파문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논쟁은 국내외 불교계와 관련 학계로 번졌고, 1990년 송광사에서 보조사상연구원이 주최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주제의 대규모 국제학술회의에서 이 문제를 집중 논의한 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논란의 쟁점은 일단 깨달은 후에 수행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지눌의 ‘돈오점수’에서 ‘돈오’가 성철 스님의 지적처럼 깨달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의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스승도 없이 외로운 수행과 여러 경전의 도움으로 수 차례의 전환기를 거치며 정혜결사를 완성했던 지눌과 전설적인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성철 스님의 수행과정이 달랐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후학들에게 제시하는 수행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 옳은가는 지금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지눌은 돈오점수를 방편으로 한 수행공동체 정혜결사를 창설해 당시 불교계의 세속적 타락을 막고 선과 교의 대립을 극복했다. 한편 성철은 돈오점수를 비판함으로써 수행도 제대로 안 한 채 고승대덕(高僧大德)인 양하며 종단을 전반적으로 타락시키는 많은 승려들에게 근본적 반성을 촉구했고, 이 논쟁을 통해서 불교계는 진정한 ‘깨달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됐다.이미 지눌을 논하지 않고는 한국불교를 논할 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그것이 진정으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위한 것이라면 지눌은 자신이 어떤 방편으로 사용되든 크게 누가 된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정혜쌍수 [定慧雙修]
지눌(知訥)이 주장한 불교신앙의 개념으로 선정(禪定)의 상태인 '정(定)'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인 '혜(慧)'를 함께 닦아 수행해야함을 주장하였다.

13세기 고려의 불교 신앙운동인 수선사(修禪社) 결사운동을 통하여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중점 강조한 불교신앙의 개념이다. 지눌에 의하면 불교적 수행의 요체는 정(定)과 혜(慧)에 있고 정과 혜는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고루 닦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정(定)은 산란한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하여 정신적 통일을 이룬 선정(禪定)의 상태를 말하며, 혜(慧)는 이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智慧)를 의미한다.

한편 지눌에 의하면 정과 혜는 인간의 심성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수상정혜(隨相定慧)의 두 종류가 있는데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성정혜를 발현시키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즉 진심(혹은 불성)을 먼저 깨달은 다음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는 점진적 수행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지눌의 사상은 선종(禪宗)의 입장에서 교종(敎宗 )과 선종의 갈등을 교리적으로 극복하면서 이를 발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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